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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May 29. 2024

‘라멘(らめん)’이 내어주는 다정한 온기(溫氣)

저마다의 서사를 품고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들을 알고 있다. 등하굣길에서 마주치는 아이들, 아파트 공용공간을 공유하며 지내는 이웃들, 수시로 걸음하는 일상의 공간을 지켜주는 점원들, 자주 그리운 가족들과 친구들... 때로는 알고, 때로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때로는 결코 모를 누군가의 서사를 상상하며, 모두가 필요로 하는 마음을 하나 짐작한다. 묻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 모두 마음이 담긴 ‘온기(溫氣)’를 필요로 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마음에 품은 생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듯, ‘온기’를 품은 시각으로 누군가를 보는 이유는 명확하다. 나 역시 진실한 ‘온기’를 자주 필요로 하기에. 모든 것을 무장해제 시킬 뜨거운 온기는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나, 은은하지만 다정한 온기는 조금 안다. 가만히 두면 몸집이 커질지 모를 상처. 어르고 달래고 다독임을 원하는 감각. 미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의 생채기. 예고 없이 찾아오는 공허함. 이것은 그들을 달래줄 다정한 온기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날이 있다. 마음이 깊이 가라앉는 날, 안 좋았던 일들을 머릿속에서 복기하는 날, 혼자라는 마음에 사로잡히는 날, 부정적인 생각들을 속수무책으로 흡수하는 날, 갈 곳 모를 마음을 견디는 날, 악의 없는 이야기에 마음을 베이는 날. 실재(實在) 여부가 불분명한 일들에 붙잡혀 가라앉는 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누군가의 진심이 담긴 온기나 정중한 관심, 고요한 배려가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런 날을 견디며, 어렴풋한 처방을 하나 알아냈다. 때로는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 엉킨 마음을 푸는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을 편안하게 하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일, 자신에게 따뜻한 음식을 권하는 일, 정성이 담긴 음식으로 온기를 채우는 일, 오랜 시간 우린 육수(スープ)에 끓인 ‘라멘(らめん)’을 먹는 일.

 일본의 국민 음식 중 하나인 ‘라멘(らめん)’은 뼈나 해물 등을 장시간 끓인 육수(수프(スープ)라 불린다.)를 사용해 만들어진다. 오래전, 라멘과의 첫 만남을 기억한다. 처음으로 혼자 도쿄(東京)를 여행하던 어느 저녁, 지내던 민박집 뒷골목의 라멘집을 찾았다. 예정보다 길어진 여행으로 집이 그리웠기 때문일까, 어두워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얼마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아 누적된 허기가 쓸쓸함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여름이었지만 온기가 그리웠던 그 저녁, 라멘집을 찾아가 따뜻한 ‘돈코츠(豚骨) 라멘’을 먹고 여행을 지속할 기운을 얻었던 감각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남아있다. ‘위로(慰勞)’. 라멘이 내어준 것은 위로였다. 여행을 마치면 돌아갈 곳이 있다고, 여행을 통해 성장할 거라고, 잠시 혼자의 시간일 뿐이라고, 너를 위한 이 따뜻한 음식을 먹고 기운을 내라고. 다정함을 속삭였던 ‘라멘’과의 관계는, 첫 만남부터 ‘위로’로 규정되었다.

 첫 관계 맺음의 방식으로 인함일까? 그 후 라멘은 온기가 필요한 날 떠오르는 음식이 되었고, 일본으로 이사 온 뒤 그 경향은 짙어졌다. 서늘한 비가 내리던 날, 이유 모를 공허함을 떨치려 동네를 산책하던 저녁, 낚시 후 몸에 스며든 한기를 털어내던 밤, 비가 내렸고 배가 고프던 여행지의 오후... 다정한 온기가 필요하거나 쓸쓸했던 시간 라멘은 언제나 곁을 주었고, 기꺼이 제 몫의 온기를 주었다.  

 그 온기 속에 머물다 보면, 나를 장악하던 일의 몸집은 어느덧 작아져 있었다. ‘괜찮겠구나, 별거 아니구나, 금방 털어낼 수 있겠구나. 괜찮구나’. 지금 맞서고 있는 이것을 잘 넘기리라는 믿음. 설령 그렇지 않아도, 여전히 괜찮겠다는 확신. 라멘은 다정한 온기로 그것을 알려주었다.  

삶은 면(麺)을 육수에 찍어 먹는 츠케멘(つけ麺). '찍어서 먹는 면'이라는 뜻이다.

 수프(スープ, 육수) 특유의 진한 냄새와 주인의 환대, 주문 후 신속히 진행되는 조리, 갓 만들어진 요리의 열기. 라멘을 파는 곳(店)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풍경이다. 주인의 성정에 따라 가게마다 분위기는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느낀 감성은 ‘따스함’이라 이름할만한 것이었다. 혹 운이 좋게도 친절한 이의 ‘미세(店, 가게)’만을 방문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긴 시간의 정성이 담긴 음식을 파는 이의 자부심에서 비롯된 온기일까. 그 기원은 모르지만, 라멘을 먹은 후 언제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좌) 직접 끓여먹을 수 있도록 제품화된 돈코츠(豚骨) 라멘, (우) 돈코츠(豚骨) 컵 라멘

 그 다정한 온기를 아는 나는, 이따금 나의 공간에서 그 온기를 빚어낸다. 대파, 양파, 건(乾) 새우, 무, 다시마... 재료들을 큰 냄비에 넣고 물을 가득 부어 육수를 끓인다. 뭉근하게 오래도록 육수를 끓이며, 마음이 원하는 일에 시간을 내어준다. 쓰고 싶은 글을 쓰거나, 읽고 싶던 책을 읽거나, 보고 싶던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마음을 위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재료들을 품은 육수는 서서히 깊어지고 있다. 어느덧 좋아하는 일들로 기분은 나아져 있고, 육수에서는 건강한 기운을 품은 향이 난다. 이번에는 그 육수에 시판(市販) 돈코츠(豚骨) 라멘을 끓인다. 면과 스프에 물만 붓고 끓이면 완성되는 그것을 물 대신 육수를 사용해 끓인다. 물만 육수로 바꿨을 뿐인데 맛은 한결 깊어져 있고, 즉석요리에 부족할지 모를 ‘건강함’이 보완되어 있다. (그 조차 번거롭다면 인스턴트 돈코츠 컵 라멘에 물 대신 뜨거운 육수를 부어 간편하게 즐길 수 있다.) 나의 공간에서 빚어진 나의 온기를 담고 있는 라멘을 먹으며 깨닫는다. 사실 필요했던 것은 이 ‘라멘’ 만큼의 작지만 진실한 온기였음을.

 그렇게 만들어진 라멘은 부지런히 다정함을 속삭인다.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다시 힘을 내면 된다고, 시간이 지나면 더 좋아져 있을 거라고. 괜찮다고. 너그러운 라멘은 누군가를 대신해 기꺼이 깊고 다정한 온기를 내어준다.     


오늘도 이곳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의 원문은 소믈리에 타임즈 '요리의 말들' 칼럼 https://www.sommelier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7219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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