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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Jun 20. 2024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외국에서 너를 키우며

 다른 사람의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가끔은 그 마음에 냉소를 얹기도 했고, 예의를 얹기도 했다. '무슨 상관, 그러든 말든'이라는 냉소, '실례가 아닐까?' 하는 예의. 때로는 나를 보호했다. '나한테 까지 말해주겠어? 괜히 무안해지지말고 애초에 묻지 말자' 싶은 생각. 가끔은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게 눈치라 여겼고, 때로는 굳이 알려고 들지 않았다. 알면 상처가 될 것 같은 일들은 나서서 외면하고 들기도 했다. 귀찮아서 모른 척하기도 했다. 

 여러가지 일들을 계기로 그렇게 형성된 성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도 크게 바뀔 것 같지 않으나 그럼에도 부분적으로 조금 달라졌다. '아이들'에 관한 부분에. 그리고 그것은 현재 '돌봄이 필요한 어린아이'를 키우는 나의 입장과 부분적으로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등굣길에 아이를 일부 구간까지 데려다주고 집에 오는 길, 몇몇 아이들이 동그랗게 무리 지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지나며 보니 어린 여자아이가 울고 있었고, 친구들과 지나가던 중학생들이 우는 아이를 달래주고 있었다. 모르는 사이에 걸음은 멈춰졌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학교에 가져가야 할 것(부모의 의견이 적힌 편지 혹은 가정통신문에 관한 보호자의 답문으로 예상)을 못 가져와서 학교에 가서 말씀드리기 무섭다고 아이는 미리 울고 있었다. 집에 다시 돌아가면 등교 시간에 늦고, 그대로 학교에 가자니 선생님께 말씀드리기 무섭다고 아이는 슬프게 울었다. 우는 아이를 외면하기 어려워 집에 누가 계신지 물어보니 아빠가 계시지만 아빠는 화가 나있다며 더욱 슬프게 울었다. 그 눈물과 어린 얼굴이 너무 슬퍼서 나도 모르게 '학교에 같이 가서 말씀드려 줄까' 하고 물었더니 "네."라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함께 해야 하는 정당성은 없었지만, 그냥 둘 수 없어 그 아이의 등굣길에 동행했다. 집에 누구 계시냐는 이야기에 더욱 서럽게 우는 걸로 봐서 혹시 엄마는 안 계시고 아빠가 무서운 분은 아닐까 등의 서사가 떠올랐지만 끝내 알 수 없을 일이었다. 그 아이의 보호자는커녕 안면도 없던 나는 그저 "다이죠부(괜찮아.)"라고 말해주며 교실까지 동행했다. 곧 수업 시간이 되어 아이의 선생님이 오셨고, 의아해하는 선생님께 설명했다. 나는 같은 학교 누구누구 보호자인데, 이 아이가 길에서 너무 슬프게 울고 있어서 마음이 아파서 함께 오게 되었다고 아이가 말문을 틀 수 있게 만들어주었고(아이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ㅠ), 실례했다는 인사를 덧붙이며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나의 행동을 떠올리며 머리가 조금 복잡했다. 내가 나서야 할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아이 입장에서 보면 필요한 동행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나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하며... 행여 아이의 선생님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긴다 할지라도, 마음에 이끌려서 한 일일 뿐이니깐... 그 상황에서 집도 학교도 가기 어려웠던 아이에게 조금의 위안이 되었길 바라며. 잘은 모르지만 부디 그 상황이 일시적이길 바라며.  

 아이를 키우며 학교를 보내며, 가끔 나의 발걸음을 잡는 또래 아이들을 마주한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먹은 것을 게워내고 휴지를 빌리러 온 아이(그 토사물을 모두 치우고 버려주었다.), 길에서 넘어져 무릎에 피를 흘리며 울고 있던 친구의 아이(친구에게 전화하고, 함께 기다려주었다.).. 생각보다 몸이 앞서서 나섰던 일들. 내가 결코 착하거나 정의롭지 않음을 스스로가 잘 알기에, 그 이유를 찾자면 다른 아이들을 통해 비춰 보이는 내 아이의 모습 때문이라 생각한다. 내 아이가 곤란할 때, 울고 있을 때, 힘들 때... 그렇게 생각해 보면 당장 내가 할 일이 보인다. 당장 줄 수 있는 도움을 주는 것뿐, 다른 것은 부수적이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고맙다는 인사도, 어쩌면 이상한 사람이라는 오해도.

 또한, 내가 남의눈을 의식하는 성격에 반하여 직접적 관계도 없는 상황에서 나설 수 있던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개인적 성격에서 비롯된 측면이지만, 그것은 내가 이곳의 이방인이라는 것에서 기인한 용기다. 나는 모국어가 아닌 말을 하는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다. 즉, 나는 나이지만 지금 일본어를 말하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는 생각에 어쩌면 나는 좀 더 용감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어로 말하는 나는, 내가 아는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서도 창피하지 않다. (나서는 일은 대체로 내게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모르는 이에게 괜찮냐고 묻는 일, 무슨 일이냐고 묻는 일, 내가 무슨 일로 당신을 찾아왔는지 말하는 일. 그 모든 일이 나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를 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힘은 옳다는 확신과 더불어, '외국어로 말하는 나는 내가 아는 내가 아니다.'라는 감각. 즉 '다른 인격'의 내가 되어 나는 부끄러움에 관한 염려는 내려놓고 좀 더 담대하게, 평소 내가 아는 나였다면 하지 않았고, 하지 못했을 일들. 그것들을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단적이고 미약한 행동으로는 일의 정확한 서사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며, 앞으로도 모를 것이며, 근본적인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앞의 아이가 곤란하고, 나는 미약하나마 도움을 있는 위치에 있다면, 그거 말고 다른 게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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