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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Aug 10. 2024

가까운 사람을 입체적으로 알아가는 일

당신과 나의 우주

 친언니와는 중국 상하이에서 유학시절을 같이 보냈다. 1년간 집을 벗어나 타지에서 언니와 함께 하며 느낀 것은 언니는 내가 알던, 내가 아는 언니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20년 이상을 한집에서 자매로 지냈던 언니와 집을 벗어난 공간에서 같은 공동체에 동시에 노출되고 새롭게 관계 맺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의 언니' '부모님의 딸'로 존재하던 잘 알던 사람이라고 여겼던 언니가 누군가의 친구, 학생,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모습을 보자 낯설었고 새로운 언니에게 익숙해지는 것은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새로운 언니에게 완전히 익숙해지지는 못했고, 시간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와 본가에서 함께 지내며 언니는 다시 내가 아는 언니가 되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대부분 언니의 여러 모습 중 '나의 언니'와 교류하며, 가끔 조카들의 엄마, 형부의 아내의 언니를 보고 있지만 완전히 낯선 공동체에서 새롭게 만난 언니보다는 낯설지 않아 그런대로 예측 가능한 관계를 맺으며 지내고 있다.

 언니가 최초였던 것 같다. 가까운 사람은 아니, 가까운 사람일수록 어쩌면 사실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 준 것은.


 아이를 기르며 느꼈다. 나만 아는 아이의 얼굴이 있다고. 양육자, 특히 제1양육자만이 포착할 수 있는 아이의 특정 얼굴이 있고, 양육자에게만 존재하는 특정한 아이가 있다.

 반대로, 아이가 자라서 유치원과 학교에 진학하자 집에서 아이를 보는 사람은 모를 수밖에 없는 새로운 아이가 있음을 알았다. 그 아이를 만날 수 있는 자리는 가끔 주어지는 유치원과 학교의 참관 수업을 통해서였다. 그곳에는 내가 알지만, 사실은 내가 모르는 아이가 있었다. 친구들과 웃는 모습, 선생님을 바라보는 모습, 무언가에 임하는 모습. 모든 곳에 내가 모르던 새로운 아이가 있었고, 내가 아는 아이는 이따금 아이가 나를 보는 얼굴에서 나올 뿐이었다.

 새로운 아이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퍽 흥미로웠고, 아이는 내가 모르는 곳에서 자신의 새로운 세계를 꾸리며 잘 자라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지만 고백하자면 그 흥미와 안도 뒤에는 일말의 섭섭함이라 이름할만한 감정도 섞여 있었다. 아이는 언젠가는 자신의 세계를 키우다 점점 내가 모르는 모습이 많은 세계로 넘어갈 테고, 응당 그래야 하겠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조금 ) 슬퍼진다. 나는 간절히 나만의 세계를 원했고, 부모님과도 그렇게 멀어져 왔고 지금도 부지런히 나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으면서도, 그와는 별개로 아이만의 세계를 약간의 섭섭한 마음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하니 지극히 나 중심의 육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는 일이 그러하듯 육아 또한 온전히 합리성의 영역은 아니지만.   


 그런가 하면 남편은 어떠한가? 남편과는 군 교육기관에서 만났고, 오랫동안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구체성을 가진 사람이 된 후 남편과의 관계는 대부분 1:1로 이루어져 왔고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알고 지낸 시간과는 별개로 나는 남편의 남자친구 혹은 남편의 모습 이외의 개인은 잘 모를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의 원 가족(시가)들과의 모임에서 온전히 편할 수 없었던 이유도 조금 설명이 된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동생이고, 누군가의 사촌인 남편의 얼굴이 익숙하지 않고, 남편조차 낯선 그 모임(시가)에서 온전히 편안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연했을지 모른다.  (물론 모든 관계를 심플하게 하나의 원인으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


 가까운 가족들을 예로 들었지만 지인과 친구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지 않을까? 나의 친구들, 나의 스승, 나의 멘토, 나의 지인. '나'를 기반으로 맺어진 관계의 사람들은 사실은 얼마나 다양한 자신의 우주를 품고 있을 것이며 나는 누군가와 알고 지냈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 동안 그 사람을 얼마나 제대로 알아왔던 것일까. 나는 단지 나와의 관계 속에 정의되는 그 사람을 알아왔을 뿐, 그의 많은 얼굴들은 끝내 모를 것이고, 끝내 모르는 것이 좋을 얼굴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에게 끝내 내보이지 않는 것이 나을 나의 얼굴들도 많을 것이다.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서로 오픈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그럼에도 내보이고 싶고 만나보고 싶은 얼굴을 고를 수 있다면 나로서는 서로를 성장시킬 수 있고, 서로에게 가장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역할을 담은 얼굴을 고르고 싶다. 어쩌면 그것이 누군과와의 관계에서 줄 수 있고 바라는 거의 모든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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