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닌 글을 쓴다면, 과연 글을 쓰는 이유가 있을까.
처음 개인 브런치 주소를 직접 알린 사람은 남편과 남동생과 베프 한 명이었다. 실질적으로 나의 브런치 스토리에는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편했다. 그러다 몇몇 글이 관심을 받으며 (우연히) 지인을 만나고 친구를 만났다. 그 후 글벗이 되고 싶은 몇몇 주변 사람들에게도 개인 브런치 주소를 알렸고, 몇몇 분들은 글을 쓰며 친분이 생겼다.
그렇게 글 쓰는 자아가 생기다 보니 문제는 '감정'을 표현하는 부분에서 생겨났다. 주로 썼던 군인 생활이나 일본 생활, 일상에 관한 글을 사실에 입각해 담담하게 쓰는 글은 괜찮았지만, 감정을 담고 싶은 글은 자아를 의식하며 (가끔) 제동이 걸렸다.
가끔(사실 자주) 찾아오는 휘몰아치는 감정, 불쾌함과 미움. 정제되지 않은 아름답지 못한 감정들. 그것들을 표현하기에 앞서 의식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나를 의식했다.
일상에는 아름답지 않은 일들이 많다. 무척 많다. 그것들과 그것에서 빚어진 감정을 날것 그대로 적나라하게 쓰고 싶을 때, 가끔 구체적인 누군가가 떠올랐다. 민망하거나 꺼려질 때가 있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 일을 글에서조차 눈치 보고 신경 써야 하는 것도 싫었다. (물론 누구도 나의 글을 깊게 염두에 두지 않고, 안 읽을 때도 많지만 그럼에도!)
사실 쓰지 않으면 될 일이었지만 쓰고 싶었다. 어떻게든 그 마음을 표현해서 풀어내고 싶었다. 한날은 글쓰기 계정을 다시 만들어야 하나 생각까지 했다. 알리지도 않고, '내'가 누군지도 알 수 없다면 날것 그대로의 아름답지 않은 감정들을 편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결론은 명확했다. 나의 글에는 필연적으로 내가 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닌 나의 글을 쓴다면, 그렇다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니, 애초에 '내'가 아닌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글쓰기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에세이를 가장 편애하지만 가끔 소설을 읽는다. 어떤 소설들을 몰입해 읽다 보면 어느 대목에서 작가의 용기에 탄복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과 상황을 통해 등장하는 사람 내면의 온갖 치졸하고, 비열하고 지질한. 아름답지 못한 마음들과 행위들. 삶의 적나라한 현실들. 소설을 통해 그것들을 만나면 단박에 이해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 직 간접적으로 겪었고, 알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부끄러움과 체면 때문에 자신에게는 없는 영역의 일로 치부한 일들이 드러난 어떤 소설에 그토록 공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그것을 소설이라는 형태를 빌려 공론화할 수 있는 작가는 무척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결국 누군가의 글은 자신이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결코 내 안에 없는 것을 쓸 수 없기에.
그래서 결론은 어떤 형태로든 나는 결국 '나'를 관통한 글을 쓸 수밖에 없겠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감추고, 때로는 끝없이 솔직한 그런 교묘한 글을. 끝내 떨질 수 없을지 모를 한 가닥의 자의식을 꼭 쥐고.
"에세이야 말로 실은 무시무시한 픽션이라는 걸 알아요. (중략) 어떤 사실은 교묘하게 감추고 어떤 사실은 티 안 나게 부풀리면서 저는 제 글 속에서 언제나 실제의 저보다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변모해요. (중략) 그렇지만 다른 작가들의 잘 윤색된 에세이를 보는 것은 여전히 아찔하게 좋아요." -요조,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