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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Sep 25. 2024

소대장의 옷을 입는다고 소대장이 되지 않는다.

적응의 날들

 소대장이 된 지 한 달. 아직 소대원들이 어색하다. 조금씩 신병도 들어오고 나보다 늦게 합류한 아이들이 생기고 있지만, 적응이 느린 나는 먼저 이곳에 온 사람들 틈에 아주 조금씩 나의 자리를 만들고 있다.

 소대장을 시작했던 첫 마음을 떠올려 본다.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어 군인이 되었고, 바람대로 소대장이 되어 나에게 맡겨진 소대원들(26명)을 한 명 한 명 진심으로 사랑하며 이끌자는 각오로 이 일을 시작했다. 처음 마음은 거창해도 좋으니깐, 진심이었으니깐.

 그럼 나는 왜 소대장이 되고 싶었을까. 사무실에서 행정 업무만 하는 참모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남동생 친구들과는 곧잘 친했으니깐(혼자 착각이었나;), 비슷한 나이의 소대원들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근거는 없지만) 내 몸에는 야전(野戰)의 피가 흐를 것 같아서. 내 안에 안정을 거부하는 방랑적인 기질이 소대장에 본질적으로 닿아있을 것 같아서. 안정과는 멀어 보이는 소대장이지만 안정된 것 없어도 자신을 믿고 야전을 누비는 모습이 멋질 것 같아서. 제대로 아는 게 없으니 어느 쪽도 엄청 진지한 이유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는 현재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보직 중 개인적으로 그게 제일 매력적이라.

한 달간 소대장을 해 본 결과 상상과 실상은 많이 달랐고(탄약 소대장인 나의 주 업무는 탄약고 관리와 제초작업이다.), 예상 못한 큰 복병 중 하나는 의외로 '나'다. 전투복을 입어도 여전히 나일뿐인 나를 보며, 소대장의 옷을 입는다고 소대장이 되지 않는다는 명확한 사실을 이제야 깊이 깨닫는다. 특히 이 낯가림은 소대장 임무 수행에 큰 방해 요인이다.

 소대장 취임 첫날, 선임 소대장은 자신의 소대를 인수인계하며 나를 온 중대원이 모인 자리에 두고 나갔다. 일제히 나를 보던 얼굴들. 할 말이 전혀 없었지만, 당황한 기색을 비추는 건 더 싫었다. 다행히 극한의 순발력을 발휘해 개그를 선보일 아이를 모집해 그 시간을 넘겼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까 봐 떨렸다.) 그 멋진 아이가 나 대신 나서서 개그를 선보이는 동안, 다음 순서를 고민하던 중 중대장님이 오셨다. 편안하게 중대원들을 휘어잡으며 대화를 이어가시던 그분. 신기했다. 대위가 되면 저렇게 되는 건가? 그때는 그렇게 넘어갔지만 왠지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건 앞으로도 적성에 맞을 것 같지 않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이 많은 애들이랑 한꺼번에 친해지는 법을 모르겠다. 생활관에 놀러 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고, 결심하고 움직인다. 어색함을 숨기고 나름 자연스럽게 들어가도,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나랑 놀아주는 아이들은 없다고 봐야 한다. 일단 같이 TV를 보고 앉아 있으면 또 그런 생각이 든다. 하루 종일 같이 일했는데 생활관에까지 내가 와있으면 불편하지 않을까? 굳이 쉬는 시간까지 소대장이 여기? 이런 생각. 물론 나 개인이 여기서 배척받을 이유는 없지만, 간부라면 다를 테니깐. 그래서 나갈까 싶다가도 교본(아마 군인복무규율 같다.)에서 소대장은 소대원들이랑 항상 같이 있는 게 좋다고 했는데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거다. 물론 군인복무규율을 전부 따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자! 소대장을 주목한다. 주목!" 류의 멘트는 절대 하지 않는다. 아무튼 결국 용기 내서 생활관에 놀러 가서 TV를 보고 잡생각을 하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오래 있지도 않는다. 아이들은 곧 환복하고 저녁 근무에 투입해야 하고, 나는 중대 회의에 참석해야 하니깐. 결국 오늘도 TV만 봤을 뿐 딱히 친해진 느낌은 없다.

 소대원들과 한 명씩 면담을 하고 있다. 소대원들이 훈련소에서 작성한 자료를 보며 나름 파악해 두었지만, 글로 아는 것과 대화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상담 패턴은 대체로 같다.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가고 흐르는 정적... 못 참는 사람이 나서야 한다. 상대와의 케미에 따라 다르지만 대화의 스킬이 능숙한 애들은 아무 말일지언정 면담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고 떠나는데(그때 나오는 말에 의외로 고급 정보들이 있다.), 나보다 더 말이 없는 애는 내가 나서서 아무 말을 해야 한다. '난 원래 아무 말 안 하는 캐릭터인데'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상담을 마치고 상담 일지를 기록한다. 기록보다는 아이들과 더 가까워지는데 초점을 맞추자는 생각을 하며. 개인적으로 난처한 케이스는 군에 반감이 있는 아이들. 지켜보니 그럴 경우는 필요한 선에서 답하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게 현명하다. 필요한 선을 명확히 모르니, 선임 소대장이랑도 의견을 나눠봐야겠다.

 또 다른 복병은 성별일까? 나는 생활관에서 동숙하며 오대기(5분 전투대기부대, 긴급한 초동조치가 필요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하여 군대에서 운용하고 있는 부대) 하는 선임 소대장들과는 출발부터 다르다. 선임들은 나를 부러워하지만, 나는 오대기가 하고 싶다. 다들 말을 안 꺼내는 걸로 봐서 안 시켜줄 것 같아 하고 싶다고 말은 안 하고 있다. 결과를 모를 때는 나서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깐. 또, 선임들은 아이들이랑 웃통을 벗고 작업하거나, 전역하는 아이들을 boq에 불러 친목 도모도 하는데 나는 먼 곳에 있는 영외 숙소에 살아 때가 되면 위병소 밖으로 사라지니 친밀감 형성에도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성별의 문제가 전부일까? 성별은 그렇다 쳐도, 성격은? 나는 적당한 사교성을 지닌 보통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일종의 허세일지 모르지만 너무 말이 없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창피하다. 근데 밑천은 빠르게 드러난다.  ‘새로 오신 소대장님은 여성분인데 부끄러움이 많으시고 어쩌고... ’ 분대장의 일기를 읽다 보니 화끈거렸다. 물론 누군가의 일기를 일부러 보지 않는다. 궁금하지도 않고, 실례라 생각한다. 단지 sns에 전체 공개로 올라온 분대장의 일기를 발견했을 뿐. 아까 면담한 말년 병장도 그랬다. "소대장님은 내성적이시다 아닙니까?" 어법에 맞지 않는 '다나까'체는 차치하고, 들킨 기분이었다.

 내가 털털했다면 어땠을까. 털털하게 분위기를 휘어잡는 부류.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지금보다는 빠르게 적응하지 않았을까?

 또 이런 생각도 한다. 성별도 성격도 모두 핑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 나는 그냥 타인을 나 스스로 허용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 두고 싶은 것 아닐까? 그게 안전하고 안심이 되니깐. 나의 독특함 혹은 괴팍함을 숨길 수 있는 거리. 가까이에서 보면 사람은 이상한 점 투성이이므로 나는 그냥 내 단점도 상대의 단점도 싫은 거 아닐까. 가장 멀쩡한 모습만 보이고 상대의 가장 멀쩡한 모습만 보고 싶은 거. 그래서 사실은 나 스스로 아이들과 거리감을 유지하는 부분은 없을까?

모르겠다. 근데 한 가지는 알겠다. 어찌 됐던 마음으로는 소대원들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 아이들이니깐. 그렇다면 진심은 통하지 않을까. 시간이 걸려도.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내 생각에는 나답게 이 조직에 받아들여졌듯, 나답게 소대장으로 살아남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무튼 면담이라도 지속적으로 이어가야겠다. 소대장은 소대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니깐.. 기분 탓인가? 좀 질척거리는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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