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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Sep 11. 2024

Prolog. 어쩌면 모든 것은 행군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나는 극한의 행군을 하고 있다. 장교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다. 끝 모를 아득함과 막막함의 연속이었던 16주간의 사관후보생 훈련을 견디고, 장교가 되기 위한 훈련들 가운데 가장 난도가 높다는 유격훈련과 FTX(Field training excercise, 야외기동훈련)까지 마쳤다. 이제 숙영지로 복귀하는 이 행군을 끝으로 나는 장교가 된다.

 마지막이기에 극한을 경험해야 하는 걸까? 마지막 관문을 넘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마지막'이라는 말조차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군장은 행군 시작과 동시에 온 힘을 쥐어짜 나를 짓누르고 있고, 2주간 이어졌던 훈련과 야외취침으로 바닥난 체력은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끈질기게 나를 설득한다.

 어쩌면 이것은 경고 아닐까? 이 훈련을 끝으로 이제는 새로운 차원의 고통이 시작될 것임을 알려주는 경고. 지금까지의 고통은 안전한 테두리 안에서 연출된 고통이었을 뿐, 사실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경고.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수 없다. 이제 나는 쓰러지고 싶다. 그만 정신을 잃고 싶다. 할 수 있는 건 없다. 쓰러지고 싶지만 쓰러지지 않는 몸을 이끌고, 조금도 줄지 않는 행군의 남은 거리를 헤아리며 그저 걸을 뿐.


 어쩌면 모든 것은 그날의 행군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새벽 군장을 메고 어두운 산길을 끝 모르고 걷던 시간, 모든 것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던 마지막 행군의 시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글은 자신의 등장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왜 그랬을까.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문장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의 암담한 상황과 고통들이 생각할새도 없이 문장이 되어 나를 뚫고 나왔다. 미처 제대로 들을 수도 없이 쉴 새 없이 쏟아지던 문장에 휩싸여 극한의 시간은 잠시 사라졌다. 어디도 아닌 곳에서 찰나의 순간 생각했다. 언젠가는 군 생활의 모든 일을 글로 쓰겠구나 라고. 구체적으로 무엇이 쓰일지 어떤 모습일지 언제 완성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생각하고 결심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니었다. 그날 극한의 행군을 끝으로 나는 장교가 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극한의 시간 나타나 나를 강렬하게 사로잡고 헤집었던 글들이 그토록 오래도록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읽을 수 없었던 숨겨진 글들을 낱낱이 읽기를 뜨겁게 원하던 사람은 누구보다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그 숨겨진 글들을 만나기 위해 군인으로써의 날들을 견디고 또 견뎌야 했다는 것을. 견뎌야 했던 시간들이 떠나며 남긴 어둠의 무게에서 놓여나기 위해 수없이 긴 시간 나를 부정해야 했다는 것을. 글이 나를 찾아온 대가를 그때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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