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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Sep 18. 2024

그때 도망쳤어야 했다.

내일은 말씀드려야지

 가끔은 어떤 결론에 이르기까지 최대한 결정을 보류하려고 노력한다. 한번 생각의 방향을 그쪽으로 틀면 그 뒤로는 모든 것이 그쪽으로 해석되며 의심을 확신으로 굳혀주니깐. 확신으로 굳어지면 웬만해서는 돌이키기 어려우니깐. 몸은 결국 생각을 따라가고, 그 후로는 일이 커지니깐. 그래서 느낌이 가리키는 쪽을 이미 알면서도, 아니라는 증거를 쥐어짜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한다. 

 지금 나는 어떠한 생각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 이 결론을 외면하기 위해 며칠 동안 노력하고 있다. 느낌이 말해주는 결론을 외면하고, 아니라는 증거를 찾고 보류하고, 보류하고 있다. 나는 보류하고 또 보.... 이젠 안 되겠다. 말해야겠다.  

나는 군대에 잘못 왔다.

 입교 3일 차.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많이 참았다. 충분히 참고 충분히 고민했다. 첫날부터 싸했던 느낌을 인정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더는 안될 것 같다. 나는 군대에 잘못 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따져볼 것도 없다.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수없는 집합 방송, 짧은 샤워시간, 더 짧은 환복 시간, 정신교육... 정신을 차릴새 없는 타이트한 스케줄도 짜증 나지만 더 암담한 이유는 따로 있다.  여자 군인 생활이 굉장히 힘들듯한 불길한 예감. 그것이 예감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이 선명한 확신. '촉'은 말한다. 이거 아니라고. 지금 도망치라고. 

"귀관(貴官)들이 여자야? 그럴 거면 다 나가버려!" 여자 훈육장교님의 멘트가 이제는 환청으로 까지 따라다닌다. 심지어 환청이 아닐 때가 많아서 더 무섭다. 종합해 보면 목소리는 소리 지른다 싶을 정도로 크게, 상대에게 말할 때는 과도한 생글거림 금지, 울지 말 것, 걸음걸이, 자세...  또 뭐가 있었더라? 한두 개가 아니라 잘 기억도 안 난다. 대부분의 남자애들도 그러고 있다고 따질 생각은 없다. 며칠 전까지 우리는 민간인이었다는 사실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남자 동기들이랑 훈련을 같이 받고 있다. 어제는 집합 시간 전까지 대화하고 있으니 샤우팅이 날아왔다. "여기가 무슨 대학 캠퍼스야? 놀러 왔어?" 몰랐다. 집합 시간이 될 때까지 침묵하고 정자세로 대기하고 있어야 함을.

 심지어 여자 후보생들만 모아놓고 종종 정신교육을 한다. 교육을 들으며 말씀에 부합한 여자 군인상(像)을 그려보니 답이 나온다. 엄청 드라이한 사람 그 자체. 훈육장교님 본인부터 저 군번에 장교 교육 기관에 계신다는 것은, 엄청난 엘리트에 올바르고 바람직한 여자 군인의 전형이라는 건데... 내가 16주 동안 그렇게 변신한다는 게 가능이나 할까?

 정신교육 내용도 선뜻 수긍은 안된다. 남자 후보생들과 함께 훈련을 받지만 기수부터 다르니 자부심을 가질 것이며, 교육기간 동안 과도하게 사적으로 친해짐을 지양하고...로 시작해 나중에 부대 생활에 관한 당부로 이어졌다가 결론은 부대에서 '여자로 보이지 말 것' 같던데 맞나? 졸아서 잘 기억도 안 난다. 밤에는 두 시간씩 불침번 근무까지 편성되니 수면시간이 말이 8시간이지 너무 피곤하다. 아무튼 그건 훈육장교님의 주관적인 생각 아닐까? 어딜 가든 본인이 할 탓 아닐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나랑 심히 안 맞을 것 같다는 거. 늦기 전에 나가는 게 나을 것 같다. 

 어리석었다. 혹하는 마음으로 지원했다가 모든 시험(서류전형, 신체검사, 체력검정, 적성검사, 면접)을 한 번에 통과해 혹시 이것이 내 적성일까 생각하며 살짝 뿌듯해하기까지 했다니. 어쩌면 빵빵했던 지원자들도 한몫 거들었을지도 모른다. 단체 스터디를 결성해 준비하고 있었거나 몇 년에 걸쳐 준비하던 지원자, 직장 다니다 온 지원자까지.. 덕분에 괜찮은 직업인가 보다고 착각한 것도 실수였다. 그 결과로 얻은 건 고난의 사관후보생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일 뿐인 것을. 머리도 귀밑 3센티로 잘랐다.

 근데 궁금하다. 나야 모르고 와버렸다 치고, 스터디를 만들어 그룹으로 준비하고 길게는 몇 년 준비한 사람들은 뭘까? 설마 이미 다 알고도 입대를 결심했다는 건가? 부사관으로 근무했던 애들도 있던데, 이 모든 걸 처음부터 다 알면서도 여기 올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건가? 그건 너무 대단한 거 아닐까? 아니면 혹시 나만 힘들고 다들 별로 안 힘든 건가? 근데 아까 우는 애 있던데... 아니면 훈련만 버티고 임관하면 좀 살만해지려나?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심지어 지금은 가입교 기간이다. 가(假) 입교. 그럼 지금은 정식 훈련 기간에 포함도 안된다는 건데, 3일째 의미 없는 개고생 중이라니... 근데 가(假) 입교라면? 나갈 사람은 나갈 수 있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남자애 한 명 건강상의 이유로 나가기는 했다. (부럽게도) 합격하고 안 온 애도 있고.. 옆 중대 여자애도 한 명 나갔다는 거 같던데. 나갈 수 있는 거 맞나 보다. 

 무섭지만... 너무 무섭지만 그만둔다고 말씀드려야겠다. 오늘은 이미 끝났으니 어쩔 수 없고, 내일은 일어나자마자 꼭 말씀드려야겠다. 설마 이유가 타당하지 않다고 안 보내 주는 건 아니겠지? 

 이제 곧 화생방이고 며칠 뒤에 온몸이 다 긁힌다는 각개전투도 있으니 그전에 나가야 한다. 퇴소하면 주변에는 창피하니깐 일단 일본에 가있어야지. 예전에 살던데 가서 아르바이트 좀 하면서 진로를 고민해 봐야겠다. 일단 자야겠다. 오늘도 불침번 근무가 있으니 얼른 잠들어야 한다. 

근데 말씀드린다고 생각하니 무섭고 떨린다. 설마, 매일같이 이 생각만 되풀이하다가 임관해 버리는 건 아니겠지? 용기를 내자. 내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훈육장교실부터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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