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마음과 태도, 좋은 글은 왜 좋은가
하루키가 글을 쓰는 스스로를 규정하는 정체성은 소설가이지만 그의 소설은 '상실의 시대'만 읽어봤을 뿐, 그의 소설보다는 인간 하루키의 이야기를 편애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내지는 그의 에세이들을. 나에게는 그 스스로 만든 작품 속 하루키 보다는 작품 바깥의 인간 하루키가 더 흥미롭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일(글)을 대하는 태도라던가 달리는 태도 같은. 매사 진지하고 성실하게 임해 기어이 경지에 오르는 태도. '작가'로서 하루키를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런 지점이 흥미로웠다.
단편적으로 파악하던 하루키였지만, 최근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읽다가 그의 새로운 위대함을 발견했다. 그 위대함은 그가 다른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보는 태도에서 드러났다. 그것을 하루키의 안목(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견식)이라 표현해야 할까. 그리고 하루키는 자신의 안목으로 포착해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한 것들을 자신의 언어로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작품 여기저기에는 기묘하고 깜짝 놀랄 만한 비일상성이 깃들어 있고, 저도 모르는 새 터져 나오는 열려 있는 유머 감각이 있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사실성이 있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정신없이 빠져들어 마지막까지 단숨에 읽도록 몰아가는 강력한 추진력, 그것이 바로 카버 작품의 특징이다. 이런 것은 역시 타고난 '재능'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레이먼드 카버의 세계
-그가 쓰고자 한 것은 단 하나의 레이먼드 카버 이야기였다. 레이먼드 카버만이 포착해 낼 수 있는 세상의 풍경을 레이먼드 카버만이 풀어낼 수 있는 어법으로 픽션에 담아 이야기하는 것.(중략) 결국 한 번밖에 그를 만나지 못했지만, 그 단 한 번의 만남이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깊은 온기를 남겼다.-단 한 번의 만남이 남긴 것
하루키의 글을 읽으며 글을 쓰는 사람들은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모두 가슴에 각자의 뜨거움을 품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뜨거움이 아니라면 마음에 담긴 것들을 결코 꺼낼 이유가 없지 않을까. 아마도 하루키의 뜨거움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누구보다 강력한 형태의 뜨거움일 것으로 여겨지고, 그 뜨거운 하루키가 마침내 지향하는 글을 '좋은 글'일 것이었다.
-(번역을 하며) 내가 배운 가장 소중한 것은 소설에 임하는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런 올바른 자세는 반드시 글에 배어 나오게 마련이다. 그리고 독자의 마음을 진정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중략)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분위기인 것이다. -번역의 신
이것이 비단 소설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글에 임하는 자세는 결국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루키는 말한다. 글이 품고 있는 글이 가진 '그릇'의 크기에 관해. 문득 궁금해졌다. 그것은 어떤 개념일지. 또한 덕분에 현재 나의 연재(여자군인의 가벼운 '고백')에 임하는 마음도 조금 힌트를 얻었다.
-<밤은 부드러워>를 완벽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냉철하게 비평해 나가면 몇 가지나 결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이 작품은 도량이 큰 소설이다. (중략) 자기 자신을 향한 개인적 몰입을 보편적 몰입으로 부연해 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고백'의 순수한 의미이며 궁극의 목적이다.-기량 있는 소설
끝으로, 그럼에도 글을 쓰며 나아짐에 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을 시사하는 부분으로 맺는다.
-그래,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다.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놓인다. 우리 앞에는 아직도 드넓은 미지의 지평이 펼쳐져 있다. 그곳에는 비옥한 대지가 개척을 기다리고 있다.-다른 울림을 찾아서
하루키의 소설의 세계는 파고들어 가 보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그러지 않은 확률이 크지만. 하루키는 여러 가지 의미로 위대한 작가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