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진 Oct 20. 2022

여군 시절의 숙소

군인이 사는 공적((公的)인 장소

 직업군인에게는 숙소가 제공된다. 부대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근무했던 부대나 동기들의 상황을 보면 일반적으로 미혼의 간부에게는 방 하나가, 결혼한 간부에게는 독립된 한 채의 집이 제공되었다. 결혼한 동료들의 초대로 몇 차례 기혼자 숙소에 가본 적이 있는데 공간은 넓지 않았고 아담하고 정갈한 느낌이었다.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지난 군 생활 간에 지내던 숙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부대마다 기혼자 숙소의 할당량이 정해져 있었는지, 숙소가 부족할 경우 아파트 같은 민간 거주 공간을 빌려서 숙소로 제공하기도 했는데 그럴 경우의 숙소는 제법 넓고 쾌적했다. 당연히 모두들 넓고 쾌적한 공간을 선호하기에 군생활의 연차가 오래된 분들에게 우선적으로 순번이 돌아갔다. 가끔은 개인적으로 집을 매수하거나, 원하는 공간을 취향껏 선택해 군 숙소 이외의 공간에서 지내는 동료들도 있었는데 그럴 경우는 얼마간의 거주를 위한 지원금이 지급되었다. 동기들의 숙소를 방문해 보아도 사정은 비슷했다. 동기들의 독신자 숙소와 기혼자 숙소는 구조와 크기, 꾸밈새에서 군 숙소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원하는 주거지를 직접 선택하지 않는 이상 군 숙소는 부대의 상황에 따라 복불복이었다. 전역 전 근무하던 부대에서의 기혼 간부를 위한 숙소는 시설이 좋았다. 'ㅇㅇ마을'이라 불리던 그 숙소는 오랜 시간 사단의 관심을 받으며 지어져가고 있었고, 아파트 형태의 주거지였다. 그곳에 살던 동료들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는데 신축 건물로 꽤나 넓고 쾌적한 그 숙소는 군 생활 간에 보았던 기혼자 숙소 중 가장 괜찮았다. 

 내게도 잠깐이지만 기혼자 숙소에서 지낼 기회가 생길뻔했다. 결혼하던 당시 남편은 현역이었기에 기혼자 숙소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언급했듯, 숙소의 상황은 복불복이었고 그가 근무하던 전방 부대의 기혼자 숙소는 얼마 뒤 철거를 앞두고 있는 오래된 군인아파트였다. 남편은 머지않아 전역을 앞두고 있었고, 우리는 그 지역에서 살 계획이 없었기에 개별적으로 신혼집을 구했고, 나는 결국 군 기혼자 숙소의 생활은 겪어보지 못했다. 

 내가 군 생활하던 당시 지내던 곳은 BOQ로 불리던 독신자 숙소였다. 독신자 숙소는 대체로 영내에 있었지만, 성별이나 부대 상황에 따라 영외에 있기도 했다. 숙소가 영내에 있다면 외출 시 위병소를 통과해야 하고 출입시간이 기록되기에 신경이 쓰였겠지만, 영외라고 해서 특별히 많이 자유롭지는 않았다. 영 내외에 관계없이 그곳은 군인을 위해 제공되는 군 소유의 공간이었기에, 사적인 공간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곳이 개인 공간이 아님을 명확히 드러내 주는 것 중 하나는 정기적인 숙소 사열(査閱:부대의 훈련 정도나 장비 유지 상태를 검열하는 일, 국어사전 참조)과 불특정한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숙박이었다. 예고 없이 숙소를 방문하는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었지만, 정기적으로 숙소를 누군가에게 검사받거나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안면 없는 누군가 와서 갑자기 머무는 일은 유쾌하지 못한 일이었다. 첫 부대에서 지내던 영외 숙소는 부대에서 멀었기에 사열을 받는 일은 손에 꼽았지만, 부대에 같은 성별의 간부가 새로 전입을 오거나 방문하면 소속 부서 간부의 숙소에서 재우라는 통보가 갑자기 내려왔다.(결코 허락이나 동의를 구하는 일이 아니다.) 그 자체에 불만이 있기보다는 나의 평소 흔적이 고스란히 널려있는 집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노출하는 일도 불편했고, 안면도 없던 누군가와 한 칸의 방에서 함께 지내는 일도 부족한 사교성으로는 쉽지 않았다. 첫 만남이 중요한데 누군가와의 첫 만남을 나의 마음이 그를 환영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해야 하는 일도 속상했다. 영내 숙소에서 지내던 후배들의 상황 또한 좋지 않았다. 정기적인 사열을 위해 쉬는 날 단체로 숙소 안팎을 청소하고, 사열이 있는 날 숙소 앞에서 대기하며 방을 점검받아야 하는 일은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연히 작은 구설수에 오를 여지조차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늘 방을 깨끗이 하고 외출시간과 복장에도 신경을 써야 했을 것이다. 

 전출을 얼마 앞두고 부대의 신규 독신자 숙소가 완공되며 나는 위병소 앞에 위치한 신규 BOQ로 이사했고, 영내 숙소의 상황을 짐작만 해보던 입장에서 당사자가 되었다. 건물은 깔끔했고 출퇴근 시간은 비약적으로 단축되었으나 포기해야 할 것이 많아졌다. 외부를 향해있는 창문은 시트지로 가리고 환기를 위해 잠깐씩 열었고, 외출 시 위병 근무자들을 마주하고 지나야 했기에 외출 복장도 외출 시간도 신경이 쓰였다. 휴일까지 통제받지는 않았지만 멀리 놀러 가고 싶은 날은 종일 불이 꺼져있을 방이 신경 쓰여 방에 있는 듯 없는 듯 알 수 없도록 약하게 스탠드 불을 켜고 나갔다. 쉬는 날 가끔씩 숙소 청소를 위해 모여야 했고,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집합 호출도 종종 있었고, 지내면서 생기는 생활 소음이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 주의를 기울였다. 오래지 않아 진급과 함께 부대를 옮기게 되어 새로운 숙소에 대한 기대감을 잠시 가졌으나, 새로운 숙소를 보는 순간 기대감은 무너졌다. 새로운 숙소는 철거를 앞둔 오래된 방 두 칸짜리 독채의 숙소를 누군가와 공유하며 지내는 형태였다. 함께 지내게 된 분은 좋은 분이셨고, 친분도 생겼으나 그와는 별개로 타인과 한집에 사는 일은 불편한 일이었다. 주방과 세탁실과 화장실, 샤워실 등의 공용 공간을 이용할 때는 서로의 이용시간을 살펴가며 움직여야 했고, 생활 소음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며 지냈다. 또한 사단 내 새로 전입 온 간부들이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까지 새로운 숙소가 마련되기 전에 우리가 지내는 숙소 내 거실 한편에 공간을 만들어 지내는 일이 수시로 이어졌다. 머물다 간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을 사심 없이 반기기에는 나는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정기적으로 이어지는 숙소 사열도 버거웠다. 바쁜 업무 가운데 시간을 내서 사열을 위해 숙소에서 대기하는 일의 의미를 헤아려보려 노력했다. 군 생활 간 머물던 숙소들을 나의 집이라 여기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곳에서 마음까지 휴식을 취하기는 쉽지 않았고, 나의 취향대로 공간을 꾸미지도 않은 채 방치된 그 시절의 숙소는 그저 한숨 돌리며 다음날을 준비하기 위한 거처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만약 기혼자의 입장이었다면 좀 더 편했을까.. 다른 가족 구성원과 함께 지냈다면 거주지 안에서 만큼은 개인생활이 보장되었을까. 가족이 있었다면 나는 군에 마음을 붙이며 지낼 수 있었을까. 내가 만약 개인적으로 숙소를 구해서 지냈다면 그럼 좀 더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을까..

 문득 지금 내가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나의 동의가 없으면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는 이곳. 적막도 시끌벅적함도 선택할 수 있는 이곳... 겪어보니 알겠다.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지극히 사적으로 살아가는 지금의 하루하루가 나를 더 나답게 해주는 삶이라는 것을. 고요한 일본 어느 소도시에서의 삶이 지금 나의 한 부분을 채워주고 어루만져주고 있다는 것을... 맑고도 아름다운 가을날이다. 쏟아지는 햇빛을 위해 창을 활짝 열었다. 오늘의 행복이 가을빛과 함께 들어온다. 이런 방문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군 시절의 사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