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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도 처방전이 있다면

무, 들깨 그리고 버섯

by 수진

"무를 씻어서 마구마구 채를 썰어. 말린 표고버섯이랑 같이 넣고 팔팔 끓여. 국물을 오랫동안 우려내. 신선한 통들깨를 갈아서 아낌없이 넣어. 뜨끈하게 밥이랑 말아먹어. 무는 따뜻한 기운을 주고 들깨는 힘이 나게 해 줄 거야."-양다솔, 적당한 실례


대체로 시간이 부족하지만 주말 아침은 더더욱 그렇다. 머리가 맑은 아침에 글쓰기 포함 이때 하면 효과적인 일들을 해치우고, 달리기도 하고 싶고, 돌아오는 길에 커피도 한잔 사고... 마감시간(남편출근 및 아이 기상 전) 내 이런저런 일들을 해치우려면 대체로 요리는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머리가 맑은 시간에 요리하기는 아까워서.

그럼에도 모처럼 밀린 일들이 없었고, 일찍 깼고, 얼마 전에 한국에서 오신 분이 이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들깻가루까지 가져다주셔서 언젠가 만들어 봐야지 생각했던 요리를 만들었다. 먹으면 힘이 난다는 요리였다. 두 줄로 정리된 문장만 보고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레시피는 간단했고, 손맛보다는 재료에 힘에 기대는 요리라 실패할 게 없는 요리였다. 맛은.. 힘이 나는 까지는 모르겠지만, 기분 탓인지 몰라도 마음이 편해지는 맛이었다. 겨울이라 재료들을 끓이는 동안 김이 창문에 서려 집이 포근해 보이는 것도 좋았다.

따뜻한 기운을 주고 힘이 나게 해 준다... 요리의 효능을 설명하는 문장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감정의 영역도 때로는 레시피와 처방전이 있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하면 엉킨 생각이 풀어지고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는 언제나 적용되는 처방.

단언할 수 없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 모든 얽힌 감정이 풀리는 날이나, 모든 감정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날은 결국 오지 않을 것 같다고. 그것은 비관적 결론이 아니라 사는 일 자체가 결국 그런 것 같다고. 단지 그때그때 동원할 수 있는 것을 동원해 조금이나마 해결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쌓이지 않도록.

그래서 오늘은 요리의 힘을 살짝 빌려봤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 요리가 품고 있다고 하는 따뜻한 기운과 힘이 필요한 시간 능력을 발휘할 것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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