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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하는 시공간 속에서

내가 되는 그곳

by 수진

일본행을 준비하던 시간, 아이와 한동안 친정 부모님 댁에서 지냈다. 아이 밥을 챙겨 주는 것 외에 공식적인 내 몫의 가사는 없었지만, 원치 않는 시간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개인 공간이 그리웠다. 다정하고 따뜻한 엄마는 인기가 많아 가족들과 친척들과 손님들이 종종 찾아왔고, 얹혀 지내던 나는 상대에 따라 내색 없이 다른 곳에 가있거나 때로는 합류하며 나의 의지로 주관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많이 그리워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코로나 규제가 완화되며 마침내 일본에 왔고, 그리워하던 나의 공간이 생겼다. 그것을 실감한 것은 얼마간의 격리와 24시간 내내 아이와 붙어있던 한동안의 가정보육을 마친 뒤,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종일 외출한 날이었다. 남편이 특별히 나를 배려하려는 의도는 없었겠지만! 종일 자유롭게 혼자의 시간을 누리고 공간을 누리며 행복했다. 남편이 어떤 것을 선물해도 그날의 내게 그 시공간만큼 값진 것은 없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체적으로는 시한부의 시공간이다. 계속 혼자면 너무 심심할 것이므로.)

그것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자 틈새 시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깐 주어져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얼마간의 시공간이.


매일 아침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준다. 때가 되면 혼자 갈 아이이기에 조급해하지 않고 도보 15분 남짓한 거리를 비교적 즐거운 마음으로 동행한다. 아이가 학교 안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봐 주고 달리기를 시작한다. (미리 러닝화를 신고 선크림을 바르고 나온다.) 달리고 집에 오면 그 사이 출근준비를 마친 남편이 곧 집을 나선다. 슬슬 마음이 급해진다. 환기를 하며 빚의 속도로 머물던 공간을 정리한 뒤 출근 전까지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남짓. 출근하지 않는 날은 필요한 것을 챙겨 집을 나서지만, 출근하는 날은 잠시 혼자의 시간을 누린다. 빛이 들어오는 시간 고요한 집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머리가 맑은 아침. (마음까지 완전히 평온한 상태는 드물지만 그럼에도) 정말 그 순간만큼은 딱 이거면 됐다 싶은 순간이 있다. 더는 바랄 게 없는 시간. 이 시간 이 공간에 존재하는 나 자체로 완전한 시간.

모든 것은 금방 흘러가기에 찰나의 시간이 지난 뒤 일상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그 감각은 기억한다. 잠시나마 온전히 내가 되었던 감각을 기억하며, '나'의 오늘을 보내기를 바란다.

살아가는 날이 늘며 얻어지는 이점 중 하나는 자신에 대해 좀 더 알아갈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이제 안다. 머무는 공간의 배경은 훗날 바뀔 수 있어도, 선호하는 시간의 모습은 바뀌지 않겠다는 것을.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얼마간. 훗날에도 그 시간을 여전히 사랑하고 놓지 않겠다는 것을.

약간의 바람을 얹는다면 지금보다는 나의 취향으로 꾸며진 공간에서.. 부디 나이는 많이 안 들어 있기를 바라는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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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찍은 사진은 없지만 결혼 후 살았던 집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집은 두 번째 집이었다. 주인의 취향으로 거실 한쪽 벽은 카페처럼, 주방 쪽 벽은 바(bar)처럼 꾸며두고 그에 걸맞은 조명까지 설치해 둔 그 집을 좋아했다. 인테리어를 공부한 적은 없지만, 첫눈에 반한 그곳에서 지내며 공간을 꾸미는 취향을 생각했다.

계획대로 되는 일은 별로 없고, 계획을 선호하는 유형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한국에 언제쯤 돌아간다는 희미한 계획이 있다. 그 위에 희미한 계획을 붙여본다. 그때는 나의 선호하는 것들을 담은 공간에서 내가 되리라고.

그러고 보면 자신을 데리고 사는 일에는...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무척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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