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은 다 퍼주자
사실 나는 일을 좋아했던 것일까. 한국 생활을 접고 후쿠오카에 오니 하고 싶은 것은 일이었다. 일이 하고 싶었다.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순수하게 일 자체를 원하는 마음과 약간의 불안함이 공존했다.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이대로 일을 하는 능력을 잃는 건 아닐까.
sns와 블로그에 보이는 일본에 사시는 한국 분들께 연락을 드려봤다.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궁금하다고. 일면식도 없는 나의 물음에 친절한 답변들이 날아왔다. (그분들과 친구가 되었다.) 개인의 능력도 다르고 사는 지역도 생활여건도 달라 적용할 부분은 없어 보였지만, 한국어 강의는 살짝 솔깃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계셨던 그분께 만나자고 청했는데 천사 같은 분이었다. 교재도 주시고 강의실 구하는 법과 수강생 모집까지 본인이 그동안 쌓은 노하우를 주셔서 일단 강의를 개설했다. 다행히(?) 수강생은 없었다.(자신이 없었다;)
그 후 집 근처에서 주 3회 일을 시작했다. 일본인들과 같은 조건에서 일하면 언어의 핸디캡으로 나의 경쟁력은 떨어지지만(핸디캡이 언어뿐일까) 언어, 문화 등 배울 점이 많아 일터가 학교가 되는 장점이 있었다. 업무에 적응할 즈음 연재하던 칼럼을 기반으로 새로운 일이 들어왔다. 월별로 일본 여행 콘텐츠를 제작하는 업무였다. 틈틈이 이곳저곳 다닌 경험이 도움이 되었고, 좋아하는 것(카페, 온천, 바다 등)에 관해 쓸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그 일에 적응할 즈음 개설한 사실조차 잊었던 한국어 강의 수강생이 나타났다. 엄청나게 자신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시간을 만들 수 있었고 일본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내게 공부가 될 터였다. '하고 싶다'는 생각에 수강생을 만나봤는데, 한국어를 향한 열정이 느껴져 함께 잘해보고 싶었다. 덕분에 뜻하지 않게 N잡의 세계에 들어섰다. N잡의 장점은 무엇인가. 반복의 지루함을 잘 못 견디는 이에게 최적의 일 아닐까. 그리고 한국어 강의는.. 특출 나게 잘하는 것이 없다고 여겼던 내가 밑천을 쥐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종종 한류(韓流)를 피부로 느낀다. K-pop과 K-드라마로 대표되는 K-컬처와 K-푸드 그리고 한국어까지. 타인에게 큰 관심을 표하지 않는 일본이지만, 한국인임이 알려지면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거나 드라마로 공부한 한국말을 건네는 분들이 나타났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유창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이곳이 대도시가 아니라 한국인은 쉽게 볼 수 없는 존재이기에 더 좋아해 주실 수도 있다.
그럼 이분들은 왜 한국어를 공부하는가. 내 생각이지만 유능한 번역 프로그램이 있음에도 여전히 한국어 공부를 원하시는 분들은 아마 한국어 능력 자체를 원하시는 것 아닐까 싶다. 좋아하는 K-관련 문화를 우회하지 않고 직접 흡수하기 위해. (내게 한국어를 배우기 원하는 분은 한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고 싶다고 했다.)
"아는 것은 다 퍼주자." 그 말의 뜻을 알지만 온전히 이해는 못했다. 아는 것을 다 퍼준다고? 그럼 본인은 어떡하시려고? 짧은 소견을 지녔던 나는 한국어 강의를 계기로 비로소 깨닫는다. 아는 것을 모두 퍼준다는 것은 나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거나, 나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자신과 타인 모두 성장하는 개념임을. 그것은 내가 한국어 강의에 임해야 하는 자세임을. 그리고 여행자료 제작도 그렇게 임해야 함을.
나에게 일은 무엇인가? 어쩌면 나는 일=재미없는 것이라는 납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뜻하지 않게 N잡의 세계에 접어듦이 감사하고 의지가 생기면서도 뭔가 '일을 많이 하는 게 좋다고?'라는 생각에 스스로 흠칫하게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것은 찬찬히 진지하게 이 걸음을 걸어야만 답할 수 있는 물음이라 여겨진다.
※ 일 : 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 또는 그 활동의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