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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손보다 빠르다.

당신들의 세계에서

by 수진

예리하고 또 예리하다. 어쩌면 이들은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타인을 감지하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할 수 없다. 이들은 온몸에 눈이 있는 것 같다.


비 오는 날, 멀리서 남자 둘이 오고 있다. 교복을 입은 걸로 봐서 중학생 같다. 보행자 전용 보도블록의 폭은 좁다. 조금씩 이들과 가까워지며 '부딪치겠다. 물이 튀겠다.' 생각이 훑고 갔는데,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어? 멈췄다.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어느덧 이동을 멈추고 대화를 나눈다. 아주 조금 그 둘이 설 수 있는 공간이 옆으로 나 있는 지점에서. 덕분에 물이 튀지 않았고, 우산이 부딪치지도 않았다. 기분 탓이었을까? 지나친 뒤 슬쩍 그들을 확인했다. 아니었다. 그들은 다시 가던 길을 간다. 저맘때의 이들을 과소평가했을까. 일련의 보이지 않는 행동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아침 달리기 길, 중간중간 골목에서 큰길로 향하는 차들을 마주한다. 내가 그들을 발견하기 전부터 진작에 나를 감지한 그들은 즉시 멈춘다. 달리기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미안한 마음에 손짓으로 먼저 가시라고 표현해도 웃으며 고개만 까닥여줄 뿐이다. 덕분에 달리기 길에 멀찍이 차가 보이면 차라리 빠르게 지나가드리자라는 생각에 오버페이스로 차 앞을 지나친다. 그 덕에 종종 페이스를 잃는다;;

일할 때 무언가 필요한 게 있으면 웬만해서는 묻지 않는다. 아니, 물을 필요가 없다. 두리번거리는 낌새를 읽은 이들은 빠르게 내어준다. 이거 찾지? 혹은 알려준다. 그거 저쪽에 있어.

이곳에서 지내며 종종 생각했다. 일본인들은 온몸에 눈이 있다고. 타인의 필요를 알아채고, 상황을 파악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움직이는 특출 난 촉이 있다고. 쇼핑 중에 살짝 몸이라도 부딪치면 과하게 사과를 건네는 이들. 덕분에 이전에는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늘 누군가와 부딪치지 않도록, 누군가의 동선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의식하는 약간의 얽매임이 하나 추가되었다.


오랜만에 한국 친구를 만났다. 긴 시간 일본에 살고 있는 그는 한동안 다도(茶道) 문화에 몸담았는데 그가 들려준 다도의 세계는 그간 알음알음 감지하던 눈치의 결정판이었다.

다다미(たたみ, 일본에서 사용되는 전통식 바닥재) 방에 들어가면 빠르게 다다미 한 칸의 폭을 파악하고 본인의 보폭수를 계산해 다다미 선을 밟지 않게끔 이동하는 것 이라던가, 접시에 놓인 다과를 빠르게 스캔해 본인의 몫을 계산한 뒤 절대로 타인의 몫을 침범하지 않는 행위라던가. 눈치껏 행해져야 할 일들의 세심한 매뉴얼에 탄복하며 조금 서늘했다. 앞으로 행동을 더욱 조심해야 할 것 같은 서늘함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성향이 좋게 발현되면 장점이 크겠다. 오래전 접했던 한 호텔에 관한 일화이다.

'야마노우에 호텔에 숙박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차를 마시거나 식사하려고 잠깐 들를 때마다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손님을 안심시키는 서비스를 느낀다. 이 소박한 호텔이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는 카리스마적인 매력을 지녔던 고 요시다 도시오 사장 덕분이다. '가만히 내버려 둔다. 하지만 항상 마음을 쓰고 있다'는 공기가 감도는 것은 '호텔과 료칸의 장점을 두루 갖춘 숙소'라는 것이 그의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책이 너무 많아, 사카이 준코

가만히 내버려 두지만 항상 마음을 쓰는 일. 정말 이들 다운 운영방침 아닐까. 그것의 온도는 과연 어떨까. 상대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무심함, 상대가 간신히 알아차리거나 잘 모를 만큼의 미세한 배려. 과함으로 인한 불편이나, 부족함으로 인한 차가움을 느끼지 않을 거리. 그것은 과히 고수의 영역이리라. (그럼에도 그 온도는 따뜻함 아닐까. 부디 따뜻함 이기를.)

흥미롭지만 가끔은 서늘하고, 그렇지만 가끔은 따뜻하고. 마침내는 흥미로운 이곳 생활의 한 면을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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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사진 출처: 하카타(博多) 킷사 마루후쿠(丸福珈琲店) 공식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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