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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Feb 23. 2023

추억의 포테토 사라다

포테토 사라다(ポテトサラダ, 감자샐러드)

 일본과의 인연은 18년 전에 시작되었다. 학생이던 나는 여름방학에 혼자 도쿄로 떠났다. 2주 일정의 여행기간 현지 유학생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처럼 일본에서 살고 싶었다. 일본에 남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그들의 소개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럽지만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 1년간 일본에서 살아보기로 했다. 

 설렘으로 시작한 생활이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물가가 비싼 도쿄에서 가진 것 없이 시작한 유학생활은 가난했다. 4명의 룸메이트들과 함께 생활했던 집은 방 두 칸의 오래된 맨션이었는데 바퀴벌레와의 동거는 일상이었다. 외출 후 돌아와 불을 켜면 순간 바퀴벌레가 사라짐이 샤샤샥 소리가 날 정도로 느껴지는 그 집의 월세는 당시 시세로 한화 월 120만 원이었다. 룸메이트 4명이서 각각 30만 원씩 부담했는데 월세를 내는 날은 무척 빨리 돌아왔다. 

 일상은 바쁘게 돌아갔다. 오전 08:00-12:00까지 학교에서 일본어 수업을 듣고, 수업을 마치면 학교 행정실에서 4시간 동안 서무 보조 아르바이트를 했다. 서류들을 정리하고 접객들에게 차를 내주고 직원분들이 요청하는 일을 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갔다. 일본어 학교 아르바이트를 마치면 자전거를 타고 다음 아르바이트 장소로 향했다. 다음 아르바이트는 신주쿠의 한 이자카야로 그곳에서 청소와 서빙을 거들었다. 아르바이트가 모두 끝나고 자정에 가까운 시간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다시 수업과 알바 두 탕을 병행하는 일이 당시의 일상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지내고 받은 돈에서 집값 30만 원을 제외하고 남은 돈으로 학비, 식비, 핸드폰비 등 생활비를 충당하면 생활은 빠듯했다. 아르바이트를 더는 늘릴 수 없으니 소비를 최소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파는 곳이라 한 끼는 이자카야에서 해결했다. 일본어 학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이자카야에 도착하면 오후 다섯 시 반. 바로 일을 시작해도 되지만, 일단 밥을 먹었다. 당시 일하던 곳은 낮에는 근처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런치 정식(규동, 생선구이 등)을 파는 곳이라, 원하면 그것을 저녁으로 먹을 수 있었다. 밥값을 따로 내지는 않았지만 밥을 먹는 30분 동안은 일을 하지 않으므로 그 시간은 시급에서 제하는 방식이 합리적이었다. 생선구이나 규동 등의 그날의 메인메뉴와 밥, 미소시루, 절임 반찬으로 구성된 식단은 깔끔했고 맛도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6시부터 저녁 장사가 시작되면 쉴 틈 없이 일했다. 내가 맡은 일은 홀 서빙으로 다른 아르바이트생 한 명과 함께 홀을 관리했다. 손님이 오면 물수건과 기본안주를 서빙하고, 주문을 받아 주방에 전달 후 만들어진 음식을 서빙하고 손님이 떠나면 뒷정리를 했다. 배테랑 아르바이트생의 경우 종종 음식을 만들기도 했지만 잠깐 근무했던 나는 요리를 해볼 기회는 없었다. 그럼에도 가까이에서 이자카야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어서 좋았고, 무엇보다 그곳은 한인타운에서 한국 룸메이트들과 일본 속 작은 한국에서 지내던 내게 새로운 세계였다. 다양한 종류의 일본 이자카야 음식들의 이름을 외우고, 사장님이 조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사장님은 프로였고 자기 관리가 대단한 분이었다. 70에 가까운 여자분이셨는데 고령의 연세에도 자세가 곧고 한차례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으며 눈빛에 총기가 가득 차 계셨던 그분은 근무시간 내내 앉지도 않고 아무것도 드시지 않을 만큼 체력이 좋았다. 이자카야의 다양한 요리들은 따라 할 엄두도 안 났고 특별히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포테토사라다(ポテトサラダ)'로 불리던 감자샐러드는 왠지 친숙하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발음을 샐러드라고 하면 그 음식의 느낌이 살지 않으니 '사라다'라고 표현하는 편이 좋겠다.) 

 사장님은 주 1회 정도 날을 잡아 대량으로 포테토사라다를 만드셨다. 주 재료 감자와 양파, 당근, 오이를 곁들였고 양념도 마요네즈 소금 후추로 단순한 구성이었다. 만드는 법도 복잡하지 않았다. 커다란 냄비에 껍질을 벗긴 감자를 잔뜩 찌고, 양파는 채 썰어 소금에 절이고 오이는 반을 갈라 얇게 슬라이스로 썰어 소금에 절이고, 당근은 채 썰어 손질하면 준비가 끝난다. 찐 감자가 알맞게 식으면 으깬 뒤 미리 손질한 각종 채소들과 함께 커다란 통에 넣고 마요네즈 소금 후추로 버무리면 끝이다. 양념의 계량은 '적당량'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아마 오랜 세월 포테토 사라다를 만들어본 몸이 기억하는 감으로 만드셨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샐러드를 손님이 주문하면 채 썬 양배추를 밑에 깔고 크게 한스쿱정도 내갔다. 가격은 600엔 전후(한국돈 6,000원). 

 이따금 손님이 없는 늦은 시간 사장님은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떡 구이나 닭가슴살 구이등의 간식을 주시곤 했는데, 간식시간 그 포테도사라다를 맛보았는지는 기억이 없다. 하지만 왠지 그 음식을 잊을 수 없던 나는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틈틈이 포테토 사라다를 만들었다. 가족들과도 나눠먹고 좋아하는 친구에게 만들어 주기도 하며 그때의 추억을 떠올렸다. 가난한 유학생이었지만 그 시간만의 즐거움이 있던 추억이 담긴 음식이라 좋았다. 

 어쩌면 그 시절의 가난함과 열악한 환경을 나름의 즐거움을 찾으며 잘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시간이 '시한부' 였음에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가진 돈이 없고, 오랜 시간 일을 하고, 허름한 집에서 지내지만 1년의 유학시간이 끝나면 나는 다시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므로... 학교도 복학하고, 내가 살던 보다 쾌적한 생활환경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므로... 

식탁에 찐 감자 한 알이 있어 포테토 사라다를 만들었고 만들다 보니 포테토 사라다에 관한 글이 쓰고 싶어졌다. 오이는 없어서 뺐다.

 인연이란 참 신기하다. 일본과의 인연은 당시의 1년으로 끝이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끝이 아니었다. 

그 뒤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나 학교도 졸업하고, 직장을 갖고, 가정을 꾸리고 그 뒤로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다시 일본에 와서 살게 되었고, 여전히 포테토사라다를 만들고 있으며, 포테토사라다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포테토 사라다는 앞으로 또 나의 새로운 추억들이 덧입혀진 요리가 되겠지. 

 ポテトサラ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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