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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Jul 19. 2023

좋아하던 여자 군인의 군상(群像)

'나'로 사는 삶

 '여군에 지원하는 사람들 자체가 아무래도 조금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중략)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이라면 비교적 자아가 강하다는 점이다. 조금 더 풀어 말하면 개척 정신, 독립심, 인생에 대한 가치관 같은 것들이 남들보다 뚜렷했다. 생각해 보라. 다른 길도 많은데 굳이 남성들만의 무대랄 수 있는 군대를 지원하는 여성이라면, 구체적인 동기야 저마다 다를지라도 삶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방향성은 분명히 세운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피우진,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

 입대를 앞두고 읽었던 책은 피우진 전 중령의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였다. 호기심에 읽었다. 그분이 겪은 30년 군생활의 기록을 읽으며 막연히 그 세계에 관한 짐작만 해봤다. 앞선 세대의 일이니 지금과 상황도 다르고, 가치관이 안 맞는 부분도 있겠지만 분명 참고할 부분은 있을 터였다. 시간이 지나 책의 내용은 대부분 잊었지만 머릿속에 남아있던 위의 부분은 가끔 생각나 스스로에게 비추어 보곤 했다. 자아가 강한 부분은 수긍하지만 삶에 대한 방향성이라... 심지어 분명하게... 이제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후보생을 시작으로 몸담은 군에서 다양한 유형의 여자들을 만났다. 다양한 유형의 사람을 보는 일은 (가끔 피곤하지만) 언제나 조금 흥미로웠다. 여학교에서 공부하며 다양한 여자들을 봐 왔지만 군에서는 그동안 만나보지 못한 유형의 여자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피우진 중령님과 같은 통찰력은 없어 내가 만난 여자 군인을 모두 아우르는 특징이나 키워드는 찾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선호했던 유형의 군상(群像)은 있었다.

 처음 접했던 여자 군인들의 유형은 그동안 내가 '여자 군인' 하면 막연히 떠올렸던 이미지의 전형(典型)에 가까웠다. 입교시험 때 만난 시험관님과 후보생 시절의 여군 훈육 장교님들은 (아마) 직책에 따른 연출도 있었겠지만 예리했고 날카로웠으며 언제든 서슬 퍼런 직언을 고. 성.으로 날릴 만큼 전투 준비태세의 최전선에 있는 자들이었다. 가르침은 얻을 수 있었지만, 가까이하기보다는 멀리 하는 게 마음 편한, 그렇지만 싫지는 않은 '센 언니'보다는 '스승'에 가까운 유형이니 굳이 이름한다면 '센 스승'이라 칭할 유형의 여자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훈육 장교님들은 당시 나보다 얼마 나이도 많지 않았고, 객관적 나이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였는데 어디서 그런 기개와 담대함이 나왔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아마 직책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부분도 있겠지만 애초에 그런 유형의 사람이 선발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해 보았다.  

 함께 미숙한 시절을 겪은 동기들은 예외로 치고, 다음으로 많은 여자 군인을 만난 것은 임관 후 병과 모임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는 1년에 한 번 내가 소속된 병과 여자들의 모임이 있었고, 그곳에서 같은 병과 선후배를 만날 수 있었다. 사모임 관련 부정적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어 글을 쓰기에 조심스러운 마음도 있지만 대부분 현역에 몸담고 있는 병과 선후배가 모여 신입들을 소개하고 서로 안면을 트고 안부를 나누며 식사하는 친목 도모가 전부인 모임이었다. 임관 직후 참석한 병과 모임에서 선배들의 모습을 본 뒤 들었던 마음은 '선망(羨望)'이었다. 갓 임관한 소위에게 이미 야전에서 현역으로 근무하는 선배들의 모습은 군인적으로 완성되었다 느껴졌고, 임관까지도 꽤나 고생했던 내게는, 마침내 그 일원이 된 것에 좋았던 기억이 있다.  

 16주간의 병과 학교 교육을 마친 뒤 나도 야전으로 갔다. 그곳에서 다양한 여자 군인을 만났다. 비로소 동등한 입장으로 만난 그들은 내게 '여자 군인'으로 묶이는 집단보다는 개개인이었고 각각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같은 직업을 가진 각기 다른 개인들과 지내보니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유형의 군상(群像)은 드러났다. 나는 다양한 유형의 그들 가운데 당당하고 마음이 건강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여자들에게 자주 매료 되었다.


 초임 간부시절 만난 s선배는 개인으로는 결코 튀지 않으면서, 일로는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주며 소수 성별로 무난하고 이질 감 없이 단체에 섞여 들어가는 법을 보여주었다. 일을 처음 시작하는 입장에서 배울 점이 많은 선배와 한 부대에서 근무하는 것은 내게도 좋은 일이었다. 한날은 부대장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는 앞으로 내가 군생활 하면서 롤모델 삼기에 부족하지 않은 유형의 사람이라고. 그 조언을 기억하며 나는 틈틈이 선배를 관찰(?)했다. 맡은 일에 관해서는 집요할 정도로 파고들어 끝을 보며 빈틈없이 해내면서도 인간적으로는 냉혹하지 않은 따뜻했던 사람. 바쁜 와중에도 종종 직속후배인 나를 불러 부족한 점을 바로잡아주고 군생활에 관한 조언도 건넨 선배. 내게 점점 조언을 건네는 사람이 없어지는 지금, 롤모델 삼을 만한 사람과 한 시절을 보내고 배웠던 시간의 소중함을 더욱 절실히 깨닫는다.  

 초임 간부 생활을 끝내고 사단 예하 대대로 옮긴 후에는 다양한 병과 사람을 만났다. 근처 대대의 j선배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솔직하고 털털한 사람이었다. 대대는 다르지만 부서는 같았던 그에게 종종 업무 관련 도움을  받았다. 파악이 잘 안 되는 업무나 자료가 필요할 때면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기꺼운 협조는 물론 큰 친분도 없는 나를 집에 식사 초대까지 하는 호의를 내주었다. 무엇보다 그의 모습이 인상 깊게 각인된 일은 떠나던 그의 모습이었다. 나처럼 복무 연장자였던 그는 최선을 다해 업무를 마무리 짓고 그동안 감사했다고 경쾌하게 인사하며 떠난 마지막 모습까지 텁텁함을 남기지 않는 산뜻한 유형의 사람이었다.

 능동성을 보여준 e선배도 있었다. 업무를 문의하다 만나게 된 그는 초면에도 훅 들어오는 적극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여군 몇 기인지를 시작으로 말문을 튼 그는 개인적인 질문들도 스스럼없이 던졌는데 그것이 실례는커녕 다정한 침범(이 표현을 사랑해서 한번 써먹고 싶었다.)으로 느껴졌다. 통신상의 문제로 잘 가동하지 않는 전술장비(ATCIS)로 골치가 아프던 나는, 잦은 문의에도 호의적인 상급부대 담당자인 그의 존재가 위안이 되었다. 불친절한 담당자를 겪어보면 안다. 호의적인 담당자의 존재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나아가 그는 나의 (어쩔 수 없었을지언정 결과적으로 과도하게 문의한) 열정을 좋게 보고 바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대에 방문해 간부들을 대상으로 해당 장비 운영 교육을 해주겠다고 먼저 제안해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대대장님이 꽂혀있던 분야였기에 더욱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장비의 담당자를 뜻하지 않게 섭외하게 된 나로서는 업무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주어진 업무로 쉴 틈 없는 와중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능동적으로 제안한 그의 태도와 적극성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좋아하던 유형의 여자들에 관한 글을 구상하다 문득 그들의 공통점이 떠올랐다. 그들은 자기 자신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공통점이. 그들은 주변과 화합하면서도 조직에서 정확히 자신의 자리를 잡고 자신다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왠지 나는 조금 확신한다. 그들은 아마 스스로와 꽤 친한 부류의 사람일 것을. 자신을 잘 알기에 주변까지 편안하게 만드는 안정된 기운이 흘러나올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앞으로도 모를 테지만 그들의 모습은 내게 가르침을 주었다. 어떤 가르침은 삶으로 드러난다는 당연함을 새삼 깨달았다. 

 커피를 마시다 그녀들은 조금 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재감은 분명하고 몽롱한 정신에 단비 같고 시원하되 결코 텁텁함을 남기지 않는 그런 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산책길에 커피를 마시던 나는 그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좋아졌고 그 기운으로 글을 마무리 지을 생각에 집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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