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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술북스 Sep 07. 2020

도서정가제가 폐지되기 위한 조건

편집자가 말해주는 출판 이슈

책값이 너무 비쌉니다. 책을 사느라 한 달에 최소 5만 원에서 최대 몇십만 원까지 지갑에서 빠져나가는 돈이 아깝습니다. 이런 생각을 저만 한 건 아닌가 봅니다. 2019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도서정가제의 폐지를 청원합니다”라는 청원이 올라왔습니다.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의했고 문화체육관광부 박양우 장관이 이에 답을 했습니다(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3076).


그리고 2020년, 문체부에서는 “국민 여론을 더 반영하겠다”며 도서정가제 개정 방향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와! 이제 ‘국민’들의 의견을 좀 들어주려나 봐요. 근데 출판계의 반발이 매우 거셉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 한국작가회의 등등 책을 만들어 파는 쪽에서는 대부분 반대 성명을 냈습니다.   


도서정가제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오히려 자잘한 할인을 금지하는 완전 도서정가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들은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굽히지 않은 채, 도서정가제 폐지를 원하는 국민들을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하죠. 유지(강화) vs 폐지(완화). 이런 식이라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양측이 합의에 다다르지 못한 채 평행선을 그을 듯합니다.


사실 저도 출판편집자라서 그런지 도서정가제를 강화하는 게 더 좋지 않나 싶습니다. 아니, 좀더 극단적으로 말해 책값이 오히려 지금보다 더 비싸져야 한다고 봅니다. 음… 제 생각에 아무도 공감 못하리란 거 저도 잘 압니다. 참 얄궂지만, 맨 처음에 말했듯이 저 역시 한 명의 소비자로서 책이 좀 비싸다고 느끼니까요.


그래서 생각을 뒤집기로 했습니다. 만약 도서정가제가 정말로 폐지되어야 한다면, 출판계와 정부와 소비자가 참여한 협상 테이블에서 우리(소비자)가 출판계에 어떤 조건을 제시해야 그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요? 사실 책값이 비싸다는 느낌적인 느낌만으로는 출판계를 설득할 수 없습니다. 싸고 비싸고를 떠나서 책을 완전히 공짜로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까요. 바로 도서관입니다.


서점이 지겨우신가요? 이 도서관은 무료로 해줍니다! 도서 대여, 인문 강연, 작가와의 만남 등등.


책값이 비싸다 하소연하기 전에 저 스스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예 한푼도 안 내고 책을 보는 혜택을 누릴 수 있음에도, 나는 왜 그 비싼 책을 굳이 사려고 할까? 눈치 빠른 분들은 알아차리셨겠지만, 이 지점에서 책을 보는 ‘독자’와 책을 사는 ‘소비자’가 구분됩니다. 도서관을 거의 찾지 않는 저는 독자보다는 소비자에 가깝습니다. 제가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보지 않고 사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욕구들을 충족시키고 싶어서입니다.


마음껏 낙서하고 싶다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이 있으면 그 페이지에 포스트잇을 붙입니다. 샤프로 주욱주욱 문장에 밑줄도 긋고 중요한 단어에는 동그라미도 치며 위아래 여백에 저의 생각을 적어놓습니다. 편집자로서 본문의 레이아웃 디자인도 눈여겨보는데요. 요즘 지겹게 본 폰트인 호요요체가 또 쓰였는지, 면주(하시라)의 위치가 책 안쪽에 있는지 바깥쪽에 있는지, 글이 왼쪽정렬인지 양쪽정렬인지 등등. 다른 책의 디자인은 나중에 저의 책을 편집할 때 중요한 참고가 됩니다. 그러므로 메모!

   

가끔 책 내용과 전혀 관련 없는 메모를 할 때도 있습니다. “짜장면 3개, 짬뽕 2개, 깐풍기 大자 하나.”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다가 이런 별 쓸데없는 문구를 발견하면 웃음이 나옵니다. “오늘 5시 약속”이라고 날림체로 적혀 있는데 무슨 약속이었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아니, 메모는 핸드폰에다 하면 되지! 그치만 아무래도 연필을 들고 종이에 끼적이는 게 더 마음이 편합니다. 저도 많이 늙었나 봅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는 이런 메모·낙서를 할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보는 책이므로 함부로 낙서해서 다른 사람들의 독서를 방해하면 안 되겠죠.


#북스타그램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적당히 조용하고 조명이 은은한 자리를 찾아 앉습니다. 가방에서 책을,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스노우 어플을 켠 다음, 책을 테이블 위에 눕히고, 세우고, 아니면 한 손으로 집어 들어보고, 괜찮은 구도를 찾은 뒤 찰칵. 이 책은 따뜻한 에세이니까, 부드러운 파스텔톤으로 보정한 뒤 인스타 업로드. 이쁘게 디자인된 리커버 에디션이라 그런지 더 마음에 듭니다.

 

사진을 찍어 SNS에 전시하기 좋은 책은 ‘물성’이 중요합니다. 책 크기, 두께, 제본 형태, 손으로 집었을 때의 감촉, 광택, 등등 책 속에 담긴 글을 제외한 그 자체의 ‘물건으로서 성질’이 바로 물성입니다. 책의 물성이 곧 전반적인 분위기를 만들죠. 묵직한 학술서인지 감동적인 소설인지, 잘 디자인된 책은 굳이 읽어보지 않더라도 한눈에 분위기가 전해져옵니다. 그 분위기가 과연 SNS상의 ‘나’의 정체성과 일치하는지를 살핀 후에 사진을 올립니다.


도서관 책으로 #책스타그램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도서관 책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 보니 상태가 좋지 못합니다. 게다가 도서관에서는 편리하게 보관하기 위해 책 커버를 없애고 바코드를 붙이는데, 별로 예쁘지 않습니다.


이것 못 참지ㅋㅋ 

저는 대여보다는 소유가 좋습니다. 뭐랄까, 안정감을 느껴요. 일단 뭔가를 사서 ‘내 꺼’로 찜해놓으면 잃어버리지 않는 한 어디로 사라질 염려도 없고, 다시 돌려줘야 한다는 부담도 없으니까요. 저는 음악도 스트리밍이 아니라 음원 파일(mp3)을 구매해 다운로드 받아서 듣습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책을 보면 지름신이 강림하는 저에겐 큰 고민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책을 읽는 속도보다 사는 속도가 훠어어얼씬 빠르다는 것입니다. 빠르면 하루아침에 다 읽지만 느리면 한 달에 걸쳐 책을 읽습니다. 한 달에 한 권 읽는 동안에도 한 달에 세 권 정도 꾸준히 새 책을 사죠. 세상엔 왜 이렇게 좋은(사고 싶은) 책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때론 책을 읽을 때보다 읽을 만한 책을 발견하고 구입할 때 더 큰 기쁨을 느낍니다.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

매월 16일이 제 월급날입니다. 200만 원 안팎의 쥐꼬리만한(?) 돈이지만 열심히 일해서 벌어들인 만큼 소중합니다. 허나 돈은 똥과 같아서 쌓아두면 악취를 풍기고 뿌리면 거름이 된다고 하더라고요(QM-「Cashflow」). 바로 서점으로 달려갑니다. 장바구니에 담아둔 책도 사고, 이번에 편집에 참고가 될 만한 것도 지르고, 신간을 훑어보며 하나둘 고르고, 독서모임에서 읽을 책도….


윽, 너무 많이 사면 곤란합니다. 돈이 나갈 구멍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까요. 책이 아무리 마음의 양식이라 하더라도 일단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죠. 그러니 주어진 한도 안에서 나에게 가장 큰 만족을 주는 책을 섬세하게 골라야 합니다. 그렇게 ‘소비’함으로써 저는 만족감을 느낍니다. 나는 영원히 시장에 예속된 프롤레타리아인가 하는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역시 돈은 좋습니다.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대부분이 돈이야! 하하하! 하하~~ 하…… 어느새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통장 잔고. 이제부터 저는 과거의 나를 질책하기 시작합니다. ‘이 쓰레기야! 미래는 생각도 안 하고 이렇게 막 돈지랄을 해대면 어떡해!! 어차피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왜 이렇게 많이 산 거야ㅠㅠ’ 눈물이 차올라서 고개를 들고 흐르지 못하게 활짝 웃습니다(like IU). 그러곤 자랑스럽게 엄지손가락으로 나 자신을 가리키면서 외칩니다. “이게 나야.”

  

“우리 이제 솔직히 털어놔봅시다. 당신 안의 그 욕망에 대해”


제가 책을 구태여 구매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사치품으로서 책을 소비(소유)하고 싶다. 이는 책의 공공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도서정가제 폐지 청원에서는 이런 말을 하더군요. “지식 전달의 매체로서 책은 언제나 구할 수 있는 곳에서 저럼한 가격으로 공급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책이 공공재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공공재는 매체인 책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지식(글)'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저렴한 가격으로(공짜로) 언제나 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도서관이죠.


책의 공공성을 운운하면서 도서정가제 폐지를 요구하면 ‘도서관’이라는 한계에 부딪힙니다. 우리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도서정가제를 폐지하라는 요구는 독자가 아닌 소비자로서 책을 싼값에 소비할(그리하여 헐값에 욕구를 충족시킬) 권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공성 집착에서 벗어나자 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야 맙니다. 제가 앞서 언급한 이런저런 욕구들은 책과 비슷하지만 전혀 공공성을 갖추지 않은 다른 대체품으로도 얼마든지 충족시킬 수 있다는 걸 말이죠.


바로 노트입니다. 노트엔 마음껏 낙서할 수 있고, 이쁜 노트를 SNS에 자랑스럽게 전시할 수도 있습니다. 책의 물성은 노트도 완전히 똑같이 갖고 있죠! 소유욕도 충족시키고 돈지랄도 할 수 있어요. 이런 노트는 가격이 얼마나 할까요? 제가 좋아하는 몰스킨 브랜드 공식 온라인 스토어를 찾아봤습니다. 『클래식 익스팬디드 노트』 130*210mm, 하드커버(양장제본), 400페이지, 내지 재질은 70g 중성지, 가격은 무려 35,200원!


책은 어떨까요. 『야밤의 공대생 만화』 140*224mm, 무선제본, 392페이지, 내지 재질은 80g 라이트지, 가격은 무려 16,000원! 노트가 책보다 두 배 이상 비싸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냥 빈 종이만 찍어낸 노트와 달리, 책은 그 안에 작가가 꾹꾹 내용을 채워 넣어야 하므로 만드는 데에 훨씬 많은 노오오오력이 듭니다. 물론 시장가격이 반드시 창작자의 노력에 비례하진 않지만, 그래도 굉장히 허탈하고 씁쓸합니다. “책값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비싸져야 한다”라고 제가 말한 심정이 좀 이해가 가시나요?


맹기완 지음, 『야밤의 공대생 만화』, 뿌리와이파리, 2017.

  

잘 아시겠지만 ‘노트정가제’ 같은 건 없습니다. 50퍼센트 세일 기간을 노려 현명하게 구매할 수도 있습니다(우와! 이제야 가격이 책이랑 비슷해지는군요). 노트에는 글이 없기 때문에 공공성도 없고, 따라서 가격경쟁을 금지하는 다소 반시장적인 정책으로 창작자를 보호할 필요도 없죠. 마찬가지로 책이 공공성을 상실하고 노트와 비슷한 상품이 된다면 도서정가제 역시 폐지되지 않을까요?


한줄요약: 책에서 ‘글’이 사라진다면 도서정가제가 폐지되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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