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치료를 시작한 지 일 년 정도 지났을 때부터 의사와 상의 하에 본격적으로 약을 끊는 연습을 시작했다. 두세 달에 거쳐 시도된 연습은 실패로 끝났다. 그 과정을 통해 내심 '나는 우울증보다 불안장애가 심한 것 같아.'라던 내 믿음은 완전히 박살났다.
신경안정제 또는 항불안제라고 불리는 약을 먹지 않으면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고, 원인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으며 특히 초창기에는 집 밖을 나가기만 해도 10분만에 기운이 쭉 빠져버릴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그렇다고 공황장애는 아니었다. 집 밖에 나가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숨쉬기가 힘들다. 약이 필요하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지만.
불안장애는 내 몸을 아프게 했지만 우울증은 내 몸에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약을 복용하고 있을 때의 상황이었다. 약을 끊기 시작하자 나는 가족들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순간에 화를 내기 시작했고 곧바로 찾아오는 자책감으로 깊은 슬픔에 빠져들었다. 그런 때면 모든 걸 그만두고 싶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약을 끊고 불쑥 찾아오는 분노들을 겪으면서 나는 그 동안 묻어두었던 회사가 내게 남긴 생채기의 면면을 고스란히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분노하는 때는 모두 회사에서 겪었던 스트레스 상황과 유사한 상황이 재연될 때였다. 당연히 내가 모든 걸 알고 있어야 된다는 듯이 대할 때, 촉박하게 일 처리를 요구할 때, 내 일이 아닌 걸 어렵게 처리해야 할 때,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일을 요구할 때 나는 분노했다.
그리고 내 분노가 병 때문이라는 걸 인정해야 할 때 슬펐다. 병 탓을 하고 싶지도, 병 뒤에 숨고 싶지도 않았지만 다른 말들로는 내 분노를 상대에게 납득시키지 못할 때 기어이 나는 병 때문이라는 말을 꺼내야 했다. 갈등 뒤에는 죽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내가 죽는 건 가족 때문이 아닌데 지금 죽으면 가족에게 죄책감을 남기게 될 것 같아서 그럴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약을 삼키고 병원에 가 상담을 하고 조언을 받아오는 일뿐이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나였다. 분노해야 할 대상은 수백 킬로미터 먼 회사에 있는데 나는 당장 바로 옆에서 나를 돕고 있는 가족에게 엉뚱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의사는 이런 행동을 투사라고 말했다.
당분간은 약을 꾸준히 복용하기로 했다. 특히 항우울제는 매일 빼놓지 않고 먹고 있다. 의사 또한 항우울제를 빼먹은 날은 없는지 체크했다. 약을 먹으면서부터 쉽게 분노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약을 먹기 전에, 자고 있는데 난데없이 날아오는 자극은 불가항력이긴 했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다.
약을 먹는다고 화를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병 때문에 화가 나는 것과 일상적으로 화가 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약은 병을 잠재워준다. 약에 기대어 평범한 듯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참 다행한 일이다. 언젠가는 온전한 내 삶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그 안에 약이 있고 없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