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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Oct 01. 2021

백수의 경제적 자유

  며칠 전 지인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와서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질문을 받았다.


  "돈은 조금씩 벌고 있지?"


  백수 생활을 한 지 일 년이 넘어서고 있다. 그동안 돈벌이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돈을 번 날보다 벌지 않는 날이 훨씬 많았고, 그나마 벌어들인 돈은 굳이 월급과 비교하지 않아도 작고 아담하고 소중했다. 실상 모은 돈을 축내고 있는 셈이다. 모은 돈을 소진하고 있다고 말하자 이번에는 다른 질문이 돌아왔다.


  "모은 돈이 아직 남아 있다고?"


  남아있다. 투자 사기를 당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보다 몇 배는 남아있었을 것이다. 어쩐지 당황스러운 마음에 백수가 되니 돈 쓸 일이 없다는 둥, 적게 쓰면 돈이 많지 않더라도 생활이 가능하더라는 둥, 조카 간식 말고는 돈 쓸 일이 없다는 둥(아님)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내질렀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백수가 되니 외출이 줄어 교통비와 외식비는 물론 의류비와 화장품비 등 많은 것이 줄었다. 파이어족을 꿈꾼 몇 년 동안 절약하는 게 습관이 되어 노력하지 않아도 아낄 수 있었다.




  회사를 다닐 때 나는 조기 은퇴를 꿈꾸며 매일 엑셀을 들여다 봤다. 조금이라도 일찍 은퇴하고 싶은데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은퇴 예상일은 단 하루도 당겨지지 않았다. 강남에서 비싼 음식을 먹을 때도 컵라면으로 간단히 끼니를 떼울 때도 내 머리 속에는 항상 계산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대단히 절약하며 살지도 못하면서 머리 속은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바빴다.


  백수가 된 후 나는 계산기 두드리기를 멈췄다. 여전히 가계부는 쓰고 있지만 퇴사할 때 얼마를 갖고 있었는지 이미 잊어버렸다. 어디에 얼마를 투자했는지도 잊어버렸다. 오늘도 P2P 투자에서 원금이 상환된 것을 보고 '어? 아직 돈이 있네?'라는 생각을 하고는 그대로 재투자했다. 나에게는 지금 얼마의 돈이 남아 있을까? 마음만 먹으면 수 분 내에 알 수 있다. 하지만 딱히 알고 싶지 않다. 그걸 알게 될 때는 정말 잔고가 바닥을 드러낼 때쯤이 아닐까?




  직장인일 때도 꿈꿨던 경제적 자유를 백수가 된 후 더 강렬하게 꿈꿨다. 하지만 오늘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이미 경제적 자유를 이룬 건지도 모른다. 당장 잔고에 다음 달 카드값과 보험료 등 각종 고정비가 나갈 정도의 돈만 남아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잔고가 어중간하게 남아있으면 쫄리지만 그런 날은 거의 없었다. 가끔 있었던 쫄리던 날도 어찌저찌 자금이 융통되면서 슬리슬쩍 넘어가곤 했다.


  백수가 되어서도 가족들의 생일과 기념일, 명절은 예전처럼 꼬박꼬박 챙기고 있다. 가족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이것은 백수로서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다. 백수지만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다는 증거.


  경제적 자유가 고정적인 경제활동 없이도 잔고를 걱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라면 나는 이미 자유롭다. 경제적 자유를 찾아 너무 멀리 돌아왔다. 퇴사한 이후로 나는 내내 자유로웠는데.

  오늘부터라도 이 자유를 충분히 즐겨야겠다. 언제 똑, 끝날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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