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부터 조카는 실바니안을 사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나에게는 딱히 사줄 만한 명분이 없었다. 이미 너무 많은 인형과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자질구레한 장난감과 먹거리들을 잔뜩 사준 탓에 주변 어른들에게 나쁜 버릇을 들인다고 줄곧 혼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조카에게 나쁜 버릇을 들이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얼리어답터인 여동생은 조카에게 아이패드와 아이폰 13 프로 맥스와 에어팟3를 사줬고, 엄마는 때때마다 조카에게 옷을 사줬으며, 아빠는 기분이 내킬 때마다 조카가 좋아하는 누런 신사임당을 쥐어줬다. 조카는 여동생에게는 외동딸이었고 우리 가족에게는 하나뿐인 아이였다.
"그러니까 사준다고 할 때 샀으면 좋았잖아."
조카가 좀 더 어렸을 때 생일 겸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토이저러스를 방문했던 여동생과 나는 마침 세일중이던 두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박스에 든 실바니안 2층 집에 눈이 돌아가서 조카에게 그걸 사자고 꼬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카는 우리의 유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만 원대 장난감을 짚어들었다. 아아 어리석은 영혼이여.
"걔 진짜 미친 거 아냐?"
조카는 과거의 자신을 제3의 인격으로 상정하고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기회는 수 년 전에 날아가버렸다. 나는 실바니안을 사줄 명분을 찾기 시작했고 겨우 찾아낸 명분은 선물의 금액만큼 나를 찾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조카는 매주 이틀 이상 우리집을 찾아와 놀다가 끌려갔고, 최근 여동생이 다른 회사로 옮기고 일찍 퇴근하게 된 이후로는 매주 금요일에 와서 자고 가겠다고 생떼를 썼다.
합의가 끝난 우리는 대형마트의 장난감 코너에 진입했다. 나는 조카가 자꾸 랜덤 피규어에 유독 관심을 가지는 것에 사행성(?) 취미가 생기는 것이 아닌지 우려했고, 아이의 경제관념을 내가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아이에게 사고 싶은 만큼 사도 되지만 그 만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 거라고 계속 강조했다.
"전화는 해도 돼?"
"안 돼. 엄마(여동생)가 오더라도 너는 오면 안 돼. 길에서 마주쳐도 아는 척 하지마."
"홍길동이네. 이모를 이모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아이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계약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근데 나 찾아갈 것 같아."라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나는 절대 안 된다고 거듭 우리의 계약을 읊어줬다. 이제 아이의 관심은 최근 들어 계속 장난감을 산 문제로 아빠에게 혼나는 것에 대한 염려로 옮겨가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이 물욕을 이기지 못했고, 아이는 실바니안 가챠 몇 개와 캠핑카와 기타 몇 가지를 골랐다.
"내년에 보자. 안녕!"
"이제 못 보는데…."
조카의 말이 이어졌지만 나는 재빨리 여동생의 차에서 내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가챠에 실패한 조카는 날 볼 낯이 없었는지 아무 연락이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 꾸며놓은 실바니안 캠핑카를 찍어 카톡으로 보냈다. 비록 가챠에 실패했지만 귀여운 애들이 나왔다는 말을 덧붙이며.
"근데 왜 자꾸 연락을 하시는 거죠?"
"우리의 계약을 잊은 건가요?"
"당신은 약속의 무거움을 알아야 해요."
조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카 없는 세 달간은 어떨까? 가끔 바닷가와 하천을 함께 걷던 나의 유일한 친구.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과 딸기우유 하나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하던 아이. 이제 나보다 키가 크다고 뻐기면서 그네는 밀어줘야 해서 어깨근육을 아리게 하는 아이. 몇 벌 안 되는 내 옷을 항상 탐 내고 있는 아이. 도서관은 싫지만 밤산책을 즐기는 아이.
"경제관념 잘 배우고 돌아올게."
삼 개월 동안 조카는 자신의 물욕을 반성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이제 금요일마다 침대 구석에서 쪽잠을 자게 만들었던 대각선 본능 조카는 당분간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정말 계약대로 삼 개월간 서로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앞으로의 삼 개월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