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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Feb 01. 2022

대화는 약보다 강하다

  "저 고백할 게 있어요."


  일기를 끄적이다가 결론을 내린 나는 거실로 나와 가족들을 향해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지난 번에 병원에 갔을 때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고 원서를 냈어요. 최근에 컨디션이 급격하게 나빠진 게 아무래도 이것 때문인 거 같아요."


  할말은 많지만 내 눈치를 보느라 차마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했던 부모님은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쌓아뒀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지금 너한테 중요한 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르바이트라도 하며 잠깐이라도 외부활동을 하는 게 건강 회복에 좋지 않을까. 운동을 하지 않아 체력이 부족해서 사소한 활동에도 쉽게 컨디션이 나빠지는 것이니 가벼운 운동부터 조금씩 시작하자.


  "그런데 원서는 어디에 냈니?"




  직전 회사에 이직하기 전에는 다시는 이 업종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일이 꼬이는 바람에 커리어를 이어가게 됐다. 그것도 약 7년 가까이. 그리고 퇴사하면서 다시 결심했다. 아예 조직 생활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그때의 결심을 뒤엎고 동종업계에 원서를 냈다. 물론 내가 오랫동안 일했던 업무에 당장 자리가 난 것은 아니지만(딱히 원하지도 않는다) 동종업계를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목줄에 끌려가는 소 모양새는 아니었다.


  일찌감치 한 군데 원서를 낸 후 다른 한 곳에는 원서를 낼지 말지 며칠간 고민했다. 일은 첫 번째 원서를 제출한 곳이 마음에 들었지만 교통이나 집과의 거리는 두 번째 지원처가 편리했다. 예전 동기에게 일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 부분은 딱히 걱정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되면 다니고, 다니다가 힘들면 그만 두면 되지."


  언제나 누나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는 남동생은 성격답게 쿨하게 말했다. 동생이 미술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주짓수 체육관을 차리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나 홀로 그 아이를 응원하고 가족들을 설득했던 걸 이제 와서 보상 받는 걸까? (아마도 까먹었을 것이다. 게다가 금전적 부담은 모두 부모님의 몫. 엄마, 아빠 죄송해요.)




  가족들과의 대화 후 며칠 동안 머리를 짓누르던 두통이 사라졌다. 아빠가 대화하는 내내 어깨를 주물러 줘서인지도 모른다. 혼자만 품고 있던 고민을 나눴다는 것만으로 마음의 긴장이 풀려 버린 건지도 모른다. 이유는 모르지만 두통이 사라져서 참 행복하다.


  대화 후 떡국을 입에 우겨넣으며 망설이던 곳에 원서를 넣기로 했다. 1지망한 곳의 절차가 느린 데다 합격을 보장할 수도 없다. 어차피 2지망한 회사에도 원서를 내야 한다면 언제 원서를 낼지 간 볼 필요가 없다. 원서를 제출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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