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새치머리가 나기 시작한 건 직전 회사에서 시스템 개편 작업에 갑자기 투입된 후였다(기승전회사). 옆머리에 한두 개씩 날 때는 뽑지 않고 내버려둘 정도로 대수롭지 않았다. 앞머리에 나기 시작할 때도 앞머리를 내리면 가려져서 새치 염색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백수가 되고나서는 더더욱 새치머리에 무관심해졌다. 그러나 최근 재취업을 준비하고 면접을 대비하면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됐다.
나에겐 흰머리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있다. 흰머리를 한 교수님이나 배우들이 멋져 보였다. 그래서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새치머리는 듬성듬성 났고 그 모양새는 그렇게 멋스럽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뒤통수에 난 길다란 흰머리를 기어이 뽑아내야지만 마음이 편해질 정도로 아름답지 않았다. 급기야 겉머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앞머리도 속머리들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특정 부위에 치중해서.
새치머리를 모두 뽑아내다가는 가뜩이나 넓은 이마가 더욱 넓어질 것 같았다. 헤어숍에 가는 걸 몹시 싫어하는 터라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집에 있는 새치 염색약을 흰머리가 집중된 앞머리와 옆머리에 듬뿍 발랐다. 머리를 감고나니 머리카락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맣게 물들었다.
흰머리가 멋있는 사람이 되기에 아직 나는 너무 젊은가보다. 차라리 머리카락이 빨리 하애졌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사회에서 과연 용인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아마 자기관리 안 하는 사람으로 치부되지는 않을까? 직전 회사에서는 스트레스 때문에 이른 나이에 새치머리가 생겨 정기적으로 염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학교에 다닐 때는 타고나길 그런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염색을 하면 뻣뻣해지는 머리카락의 촉감에 거부감이 들지만, 이제는 나도 새치 염색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젊은 척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누군가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관리 차원에서 깔끔하게. 몇 살쯤 되면 더 이상 새치 염색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을까? 몇 년 뒤면 일흔이 되는 아버지가 여전히 염색을 포기하지 못하신 걸 보면 나 역시도 결국은 바라던 대로 멋진 흰머리에 대한 로망을 오랫동안 실현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멋진 흰머리를 가지는 것도 복불복이지 싶다. 지금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나의 새치를 보면 말이다. 언젠가 새치머리가 이대로 둬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럴 듯하게 자라면 그때는 정말 흰머리가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머리카락만 멋진 사람이 아니라 멋지게 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얼마 전 조카가 보여준 유튜브 영상에 따르면 새치는 흰색이 아니라 투명색이라고 한다. 빛이 투과하면서 인간의 눈에 희게 보일 뿐 실제로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새치는 투명하다. 언젠가 방송에서 헤어디자이너가 예쁜 흰머리를 가지려면 새치로는 안 되고 하얗게 염색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헤어디자이너는 염색한 흰머리에 비해 새치는 좀 칙칙해 보인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새치 머리가 투명한 것과 관련 있는 걸까?
백수로 지내는 동안 하얗게 염색해볼 걸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염색하는 걸 싫어하긴 하지만 살면서 언제 또 이럴 기회가 있을까 생각하면 그냥 시간을 보낸 게 좀 안타깝다. 물론 그런 걸 시도해볼 만한 기력도 없기는 했지만. 재취업 시도가 실패하면 지금이라도 하얀 단발머리를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젊은 날 노랗게 물들이느라 녹아버린 머리카락을 보며 했던 후회를 다시 또 반복하게 되더라도 상관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