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람에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나부낀다. 엄마가 타라고 했던 버스는 언제 올지 소식도 없다. 버스 도착시간을 확인하고 나왔어야 하는데 내게는 아직 그런 요령이 붙지 않아 번번이 이 모양이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환승을 고민하다가 키오스크에 뜬 버스번호를 보고 까짓것 10분 더 기다려 보기로 한다.
"저거 어디로 가나?"
낯모르는 할머니 한 분이 정류장에 오자마자 키오스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정류장에는 나뿐이었다. '저거'는 뭐고 '어디'는 또 뭘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도 잘 몰라요."라고 답했다. 예상치 못하게도 곧바로 비아냥이 쏟아졌다.
"잘 몰라요~? 말 참 예쁘게 하네."
낯선 할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어들을 막기 위해 나는 구차한 설명을 다급하게 덧붙였다.
"정말 몰라요. 제가 서울에서 온 지 얼마 안 돼서요."
내려와서 버스를 탄 횟수가 열 손가락을 겨우 넘길까. 외출할 때 대부분 가족의 도움을 받는 편이라 버스도 잘 타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가는 병원도 엉뚱한 버스를 타는 바람에 택시도 잘 안 다니는 공장단지에서 간신히 택시를 잡아 탈출한 적도 있었다. 게다가 나는 심각한 길치다. 나의 무모한 오지랖은 전혀 도움될 게 없다.
할머니는 키오스크를 들여다 본 지 30초만에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듯했다. 그뒤로 여러 사람이 왔지만 그 누구에게도 "저거 어디로 가나?"라는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그랬냐고,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 미안해야 하는 건 나인 걸까. 처음부터 "죄송하지민 제가 서울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다니는 곳 외에는 아는 게 없어서 도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라고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던 걸까? 나보다 더 버스 노선을 잘 아시면서 굳이 내게 물어본 이유는 뭘까? 억울해 하는 사이 할머니는 나보다 먼저 버스를 타고 떠났다.
17년간 서울에 살면서 누군가 "이 지하철이 ○○ 방향으로 가나요?"라고 물었을 때 여유가 된다면 노선도를 뒤져서라도 답해주곤 했다. 여유가 안 되거나 너무 낯선 지명이라 자신이 없을 때, 복잡한 1호선에서는 잘 모른다고 답했다. 하지만 한 번도 비난을 받아본 적은 없다. 그래서 모른다고 답하면 욕을 먹을 거란 걸 전혀 예상치 못했다.
자신이 모르는 걸 남도 모를 수 있다. 그게 비난 받을 일이었을까. 나는 정말 할머니에게 무례했던 걸까. 나도 모르게 평생을 무례하게 살았던 걸까. 앞으로 같은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구구절절 내 사연을 설명하며 해명하고 싶지 않은데. 모른다는 게 그렇게 비난 받을 일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