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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Feb 07. 2022

무례함 VS 무례함

  겨울바람에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나부낀다. 엄마가 타라고 했던 버스는 언제 올지 소식도 없다. 버스 도착시간을 확인하고 나왔어야 하는데 내게는 아직 그런 요령이 붙지 않아 번번이 이 모양이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환승을 고민하다가 키오스크에 뜬 버스번호를 보고 까짓것 10분 더 기다려 보기로 한다.


  "저거 어디로 가나?"


  낯모르는 할머니 한 분이 정류장에 오자마자 키오스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정류장에는 나뿐이었다. '저거'는 뭐고 '어디'는 또 뭘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도 잘 몰라요."라고 답했다. 예상치 못하게도 곧바로 비아냥이 쏟아졌다.


  "잘 몰라요~? 말 참 예쁘게 하네."


  낯선 할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어들을 막기 위해 나는  구차한 설명을 다급하게 붙였다.


  "정말 몰라요. 제가 서울에서 온 지 얼마 안 돼서요."




  내려와서 버스를 탄 횟수가 열 손가락을 겨우 넘길까. 외출할 때 대부분 가족의 도움을 받는 편이라 버스도 잘 타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가는 병원도 엉뚱한 버스를 타는 바람에 택시도 잘 안 다니는 공장단지에서 간신히 택시를 잡아 탈출한 적도 있었다. 게다가 나는 심각한 길치다. 나의 무모한  오지랖은 전혀 도움될 게 없다.


  할머니는 키오스크를 들여다 본 지 30초만에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듯했다. 그뒤로 여러 사람이 왔지만 그 누구에게도 "저거 어디로 가나?"라는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그랬냐고,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 미안해야 하는 건 나인 걸까. 처음부터 "죄송하지민 제가 서울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다니는 곳 외에는 아는 게 없어서 도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라고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던 걸까? 나보다 더 버스 노선을 잘 아시면서 굳이 내게 물어본 이유는 뭘까? 억울해 하는 사이 할머니는 나보다 먼저 버스를 타고 떠났다.




  17년간 서울에 살면서 누군가 "이 지하철이 ○○ 방향으로 가나요?"라고 물었을 때 여유가 된다면 노선도를 뒤져서라도 답해주곤 했다. 여유가 안 되거나 너무 낯선 지명이라 자신이 없을 때, 복잡한 1호선에서는 잘 모른다고 답했다. 하지만 한 번도 비난을 받아본 적은 없다. 그래서 모른다고 답하면 욕을 먹을 거란 걸 전혀 예상치 못했다.


  자신이 모르는 걸 남도 모를 수 있다. 그게 비난 받을 일이었을까. 나는 정말 할머니에게 무례했던 걸까. 나도 모르게 평생을 무례하게 살았던 걸까. 앞으로 같은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구구절절 내 사연을 설명하며 해명하고 싶지 않은데. 모른다는 게 그렇게 비난 받을 일이었을까.


  슬프게도 나는 이곳이 좀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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