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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Mar 21. 2022

마흔이지만 신입입니다

  "선생님은 어떤 일 하고 싶으세요?"


  함께 입사한 이십대 직원들은 저마다 꿈에 부풀어 있다. 미래를 잃은 청년, 희망이 없는 청년, 취업난으로 꿈을 잃은 청년이라는 표현을 뉴스에서 자주 접했는데 막상 만나본 이십대들은 그렇게 절망에 휩싸여 있지 않다. 아직 나에게는 기회가 있다고,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온몸으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아직 어리니까."

  "그 말씀 오 년 전에도 했던 거 아시죠?"


  전 직장에서는 선배들 사이에 껴서 앞길이 창창한 막내 취급 받았는데(실제 막내는 아님). 상황이 순식간에 역전돼버렸다. 조카가 있어 유부녀들 사이의 화제에도 쉽게 공감할 수 있었던 반면 이십 대들과의 대화는 격세지감의 연속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회사에서 왜 그토록 90년대생이 화제가 됐는지 체감한다.


  "우리 ○○가 어때서! 우리 ○○이 여기서는 막내야!"


  대학모임 채팅창에 세대 차에 대해 한탄했더니 고작 한 살 많은 언니가 우쭈쭈를 해준다. 그래 나에게도 고작 한 살 차이가 크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나에게도 삐약이면서 삐약인 줄 모르고 어른 흉내를 냈던 때가 있었다. 정작 어른 취급을 받는 지금에 와서는 사람은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앞만 보며 걷는 그들을 보며 잠깐 내 인생이 저물었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의 행복지수는 타인과의 비교에 영향 받는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일 년 반 동안 백수일 때는 책 한 권을 완독하고 정리하는 것만으로 행복했고 존재하는 것만으로 오롯이 나일 수 있었는데, 오랜만에 사회에 나와보니 개인적 만족과 달리 사회의 시선과 평가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강사는 아니시죠?”


  급여를 받았는데 주거래 계좌로 이체할 수가 없다. 같은 계열사 은행으로만 급여를 지급해 계좌를 급히 만들었더니 한도제한에 걸렸다. 은행원은 신분증을 받은 뒤 입사자 명단을 확인해보겠다고 하더니 강사 명단에 없다며 되물었다. 이 나이쯤 돼서 대학에 신규입사하면 당연히 교수쯤은 되어야 하나 보다. 은행창구 앞에서 공연히 움츠러 드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한 시간 동안 은행 업무를 보고 나오니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왜 사람들이 회사를 욕하면서도 지금의 자리를 버리지 못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나의 연봉이, 정규직이라는 타이틀이,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명함 한 장이 나를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기분좋게 시작한 제2의 인생에서 나는 뒤늦게 서글픈 현실을 배우고 있다.



  

  ‘마흔에도 꿈이 있다고!’


  그럼에도 나는 꿋꿋하게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말하겠다. 뒤늦게 인생의 순리(?)를 배웠다고 해도 적게 일하고 적게 벌며 만족하는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일 년에 두 번 정도 보던 가족들을 언제든지 편하게 볼 수 있게 됐고, 발급해놓고 영원히 쓸 일 없을 것 같았던 알뜰교통카드를 쓰며 마일리지를 적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쉬운 점이라면 출퇴근을 걸어서 하고 싶다는 로망을 실현하지 못한다는 정도랄까? 그외 부수적인 것들은 시작 단계에서 부딪히는 사소한 어려움에 불과하다.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건강 회복이 더 빠르게 진행된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다. 대단한 성공도, 엄청난 부자도 꿈꾸지 않는다. 그저 보통의 사람으로서 이 낯선 지역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지금 나에게는 가장 큰 목표다. 이 목표를 실현하고 나면 또 다음 목표를 꿈꾸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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