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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Jun 15. 2022

효율성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여기는 전자결재도 없어서 결재판 들고 다니면서 도장 받아야 해요. 지출 서류에 풀칠해서 내야 되구요. 업무량이 많지 않은데 물리적으로 시간이 많이 걸리죠."


  "하지만 나쁘지 않아요. 느림의 미학이라고 생각해요. 예전 회사는 효율적으로 사람을 뽑아먹었거든요."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면 이전 직장과 비교해 장점과 단점이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온다. 7시 59분 59초까지 카드나 지문을 찍지 않으면 지각 처리가 되거나 지각한 시간만큼 휴가원을 내야 했던 곳에서 지각을 하든 조퇴를 하든 부서장 재량으로 넘어가는 곳에 오면 인간미가 느껴진다. 물론 나는 인간미가 없어서 지각도, 조퇴도 하지 않는다.


  총장님 결재가 삼일째 미뤄지면, 심지어 열람하고도 결재하지 않았다면 팀장님이나 처장님에게 보고하던 곳에서 총장님 결재가 평균 이 주에 한번 이뤄지는 곳으로 근무지가 바뀌면 답답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야근은 당일 오후 세 시 전까지 보고돼야 공식적으로 할 수 있다. 결재과정이 까다롭고 지지부진하다보니 편법이 생긴다. 프로젝트 시행 때문에 결재번호를 먼저 따놓는다든가, 보고되지 않은 야근을 보상 받기 위해 야근하지 않는 날을 대신 야근한 날로 보고한다.




  역시나 인간미 없는 나는 선보고 없는 야근을 선호하지 않는다. 물론 가급적 야근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대신 야근 보고 없이 일한 사람들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은 있어서 기회가 될 때마다 나서서 챙겨주고 있다. 어제도 그런 날 중에 하나였다.


  그 전부터 협조부서에서 야근을 많이 하는 걸 탐탁해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비도 아니고 국고로 지급되는 돈인데도 뭐가 그리 아까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사업과 아무 관계 없는 회의를 열고 국고로 밥을 먹으려고 언제나 눈독드리는 사람들이 정당한 야근에 매서운 눈초리를 보낸다는 게 납득되지 않았다.


  나라면 그 정도의 야림(?)은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나보다. 팀장님이 야근 보고량을 줄이라는 말을 꺼냈다. 그것도 오후 두 시에. 나는 예정된 회의가 있어서 처리할 수 없다고 답하고 자리를 피했다. 회의에 다녀왔더니 서류는 이미 파쇄기에 갈려나간 후였다.


  팀장님은 미안했는지 나를 따로 불러 회사가 야근을 잘 승인하지 않아 연평균 인당 열 시간 정도만 야근을 하며, 다른 부서는 야근을 해도 보고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보고되지 않은 야근은 후에 챙겨줄테니 섭섭해 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지금까지 보상 받지 못한 야근은 없으며, 앞으로 야근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회사가 야근을 못하게 한다는 건 일이 급하지 않다는 거 아닌가요? 일이 미뤄져도 괜찮다는 거니 저는 앞으로 야근을 하지 않을게요.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닌데 회사의 눈치를 보면서까지 하고 싶지 않아요."


  팀장님은 회사의 방침이 그렇다고 또다시 긴 연설을 늘어놓았지만 내 대답은 한결 같았다.


  "회사의 방침이 그러하니 저는 앞으로 야근하지 않겠습니다."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이 팀장님에게 불려가 한참 후에나 돌아왔다. 이번 일로 나뿐만 아니라 부서원 전체의 신망을 잃을 것이 두려웠을 것이고, 업무가 제때 굴러가지 않아 생기는 문제가 두려웠을 것이다. 심지어 내 업무는 다른 직원들과 달리 센터장이 자기 역할을 전혀 하고 있지 않아서 내가 직접 발로 뛰어야 하는 일이 많다. 내가 뛰지 않으면 아무도 뛸 사람이 없다.


  물론 일에 지장이 가도록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앞으로 점심시간에 틈틈이 일하거나 일찍 출근해 일하거나, 하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칼퇴를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음… 그래도 여긴 방학 때 단축근무라는 게 있으니 적당히 봐주면서 일해볼까? 라는 생각이 조금 들긴 한다.


  입사 후 한동안 너무 탱자탱자 놀아서 사실 짬짬이 일하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불만은 없다. 그래도 뭔가 이 기회에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은 못된 심보가 불쑥 솟아오르는 건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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