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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Jun 22. 2022

그곳은 정말 낭떠러지였을까

  의사는 타인의 감정쓰레기통이 되지 말고 정중하게 거절하라고 말했다. 그들은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으며, 고마움따위도 느끼지 않고, 타인을 오로지 자신의 감정을 배설하는 오물통으로 취급할 뿐이다. 하지만 내가 듣는 역할을 자처했던 건 고마움을 바라서가 아니었다. 그저 아프지 않길 바랐다. 아무도 아프지 않길 바랐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꺼내면 거절해야지라고, 멘트까지 속으로 반복해서 외웠지만 그 멘트가 쓰이는 일은 없었다. 나는 거절하기보다는 회피를 택했다. 상담 이전부터 쓰던 스킬이었다. 문제는 자꾸 회피하는데도 다가서는 상대에게 날카로워져서 결국 상대가 눈치를 챘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그냥 내가 일 때문에 예민한 상태인 걸로 치부된 것일 뿐이긴 했지만. 나와 상대의 마음이 반대로 가는 관계가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




  어제는 한바탕 태풍이 사무실을 훑고 지나갔다. 내 입장에서는 그저 서로의 생각이 달랐을 뿐이라고 느꼈는데, 어린 직원들 중에는 노골적으로 한쪽 편을 들며 반대편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가 있어 몹시 놀랐다. 감정적인 성향이 높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이었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내 모습에 양쪽 모두 서운해 하거나 실망한 듯했다. 알게 뭐야.


  불행 중 다행인 건 그 여파로 말로 스트레스를 푼다던 직원이 당분간은 나에게 괴로운 소리를 쏟아내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그는 정말 나를 믿어서 내게 마음을 보였던 것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을 하다보면 기존 직원들이 내가 하는 말을 무시하는 일이 이따금 있다. 아무래도 이곳 시스템을 내가 잘 모르기도 하고, 윗분들과도 덜 소통하는 상황이다보니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게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십 년 가까이 일한 짬(?)은 어디 가지 않는다. 내 말을 무시했던 직원들은 모두 한번씩은 크게 곤욕을 치뤘다. 이번 태풍도 두 달 동안 여러 차례 이야기했음에도 내가 잘못 이해한 거라고 무시한 여파가 고스란히 돌아온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함을 감지하고 대화해야 했던 시기를 너무 많이 지나쳐 버렸고,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 버렸다.




  그만두겠다고 말했던 직원은 놀랍게도 이 상황을 침착하게 버티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풍따위 지나간 적 없는 것처럼. 늘 화병이 난 것처럼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날이 잔뜩 서있었는데 그런 모습이 온데간데 없어졌다. 그렇다고 처음의 마냥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도 아니다. 그저 조용하고 침착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만두겠다고 예고했던 날로부터 이제 일주일이 남았다. 팀장님에게 다시 퇴사 이야기를 꺼낸 것 같지는 않다. 그럴 계획이 있기는 할까? 계획을 철회할 수는 있지만 이 일로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동안 나는 그 사람이 낭떠러지 위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내가 생각나서, 살아있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거듭 해서 강조했다. 하지만 정말 그 사람이 서 있는 곳은 낭떠러지였을까?


  나와 그 사람은 다르다. 생계가 중요하다는 사람에게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을 때 이 말이 너무 사치처럼 들릴까봐 조마조마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비웃음을 당하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싶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와닿지 않는 말이었을 테니까. 내 말이 위로가 되긴 했을까? 그냥 오물을 투척하기 급급하지 않았을까? 요즘처럼 감정쓰레기통이란 말이 와닿는 때가 없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그 동안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두겠다고 주변에 이야기했던 일들이 이제 와서 뼈저리게 후회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한 것 같아서, 너무 아프게 한 것 같아서 지난 시간이 후회된다. 지금 아픈 건 어쩌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라 내 업보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죄책감 때문에 힘든 것이다.


  입은 좀 더 다물고 귀는 열어야겠단 생각을 근래에는 거의 매일 하고 있다. 다음 번에 또 그만둘 일이 있다면 그때는 그만두기 이 주 전쯤부터 이야기해야겠다. 과정에 대한 고민은 이미 충분히 해봤으니 이제는 굳이 참거나 나누지 않아도 혼자 해결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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