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ULL Jul 06. 2022

100%의 인생을 갈구하는 것에 대하여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막내를 어떻게 조져놓을까 고민하며 출근하던 날, 막내는 갑자기 나를 이전보다 다정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일전에 막내가 브런치 글을 읽는 걸 본 적이 있는 터라 막내가 혹시 내 글을 본 건 아니겠지, 라는 0.001%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타격은 없다.


  막내의 변화는 내 상상과 달리 자신이 따르는 직원이 자신보다 나를 일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을 확인한 것에 기인했다는 분석이 더 정확해보인다. 타인이 하던 일을 받아 처리하다가 실수로 제출서류를 누락한 일이 있었는데, 내가 담당했던 일인 거 같다고 계속 이야기했지만 그 직원은 자꾸 막내가 작업한 게 아니냐고 반복해서 물었다. 무한한 신뢰란 이처럼 사람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놓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라는 단편을 좋아한다. 이 단편은 국내에서도 크게 히트를 쳤던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도 영향을 준 작품이다(키미노 나마에와!). 연애에 크게 흥미를 가진 편은 아니지만 이런 류의 작품을 좋아하는 걸 보면 내 연애관은 꽤 운명론적인 편인 듯하다. 물론 실상은 좀 게으른 편이긴 하지만.


  100%의 여자(남자)아이를 만나는 것이 가능할까? 불가능할 걸 알면서도 줄곧 그런 방향을 추구해왔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어떤 지점에서 100%를 갈구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를 낳는 것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막내뿐만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여러 인간관계에서 일방적인 감정만을 주고 받는 일은 드물다. 우리는 주변인물에 대해서 연민, 회피, 공감 등의 다층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밉지만 그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고, 좋아하지만 특정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하고 거리를 두며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최근만큼 주변인물들에 대해서 다채로운 감정을 동시다발적으로 느껴본 적이 어 당황스럽기도 하다. 감정적인 성향이 아직은 높은 젊은이들과 일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젊지도 않은 꼰대이니까.




  인생을 계속 살아가려면 100%의 인생을 갈구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당장 나 역시도 매일 매일 100%의 하루를 보내지 못하는데, 타인이 100% 내 마음에 들길 기대하는 건 불가능의 영역이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100%의 A, 80%의 A일 테니까.


  우리는 모두 100%가 아님을.

  그러므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듬어주며 살아가야 함을 가슴에 품고 하루를 시작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꼰대가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