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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Aug 23. 2022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할 수 있는 힘

  한동안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대개 이럴 때면 원인을 분석하곤 하는데 이번에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한편으론 이유를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원인은 대부분 아주 사소하며, 그저 약을 더 먹거나 약의 종류를 늘리면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약을 덜 먹으려는 오기와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그렇게 이 주 정도 불안한 컨디션을 버텨야 했다. 정신은 피폐해지고 예민해졌으며, 가벼운 정도의 식욕부진과 수면장애가 이어졌다. 결국 나는 항복하고 말았다.




  건강을 위해 영양제를 먹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우리집에도 여러 종류의 영양제들이 아일랜드 식탁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 아침 약을 먹으며 나는 이 약들을 그냥 영양제로 생각하기로 했다. 복용량과 종류를 늘린 지 며칠만에 나는 퇴근해 귀가하자마자 "밥 먹자"는 말에 아무런 저항없이 식탁 앞에 앉을 수 있게 되었고, 식사 후 유튜브를 켜놓고 설거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운동도, 영양제도 아니었다. 몇 알의 약이면 나는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가정은 화목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약을 끊을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흐려지고 있다. 손상된 뇌기능을 복구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희미해진다. 다행스러운 건 이런 이유로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상태에서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의 일과 직장을 택했고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고 있다. 인생에 있어 성공이라는 목표를 바라보며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전보다 다소 무능력해졌다고 해도 그게 내 인생에 딱히 영향을 미치는 건 없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욕심만큼 많은 걸 할 수 없다는 정도일까? 하지만 이건 우울증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뇌기능이 손상되는 일은 흔하다. 과거에 육아휴직에서 복귀한 선배들이 이전보다 업무능력이 낮아진 것에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재취업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이 그것과 비슷했던 것 같다. 과거보다 무능해졌다는 느낌을 지금도 종종 받고 있다. 다행인 건 내가 이 부분에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의 무능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과거만큼 깊게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고,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능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당연하기 때문에 이 사실이 아프지 않다.


  직접 겪지는 않았으나 출산이나 병으로 인해 수면 내시경을 자주 하면서 뇌기능이 저하되는 모습을 주변에서 종종 목격해왔다. 나의 뇌기능 저하도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원인 중 하나에 의해 발생한 흔한 증상이다. 꼭 이런 결정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노화로 인해 뇌기능이 저하되거나 손상되는 일을 자연스럽게 겪게 된다. 나는 아마도 앞으로 더 사회적으로 무능해질 것이다.




  불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저녁을 먹고, 지치지 않은 상태로 설거지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삶이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고작 이 정도도 하지 못해서 불행했던 삶과 비교하자면 이 정도면 충분히 행복한 삶이다. 행복하기 위해 나는 약을 먹는다. 이 행위를 '의존'이라 부르더라도 어쩔 수 없다. 지난 이 년 동안 이것보다 빠른 해결책도, 느리지만 이를 대신할 수 있는 방법도 찾지 못했다.


  몇 달만에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묘한 안도감이 퍼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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