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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Sep 02. 2022

잘 하고 있던 업무가 바뀌었다

  한동안 부서가 소란했다. 전화를 골라 받고, 회사에 나오는 것이 괴롭다고 호소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끝내는 울음을 터뜨렸고, 그 강도 또한 강해졌다. 나의 짬이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대규모 업무분장이 있을 것이고, 이번에는 나 역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어제 ○○쌤 우는 거 보고 업무분장이 바뀌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 이야기는 안하셨어요. 팀장님도 생각하시는 게 있으시겠죠."


  문제의 업무를 담당하는 옆자리 직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닌가 보다, 하고 넘기면 어김없이 예상했던 시나리오가 전개된다. 다음날 팀장님은 회의실로 나를 소환했다. 생각해보니 이 팀은 면담이 참 잦은 팀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만 해도 면담이 벌써 몇 번째인가.


  "좋은 일로 불러야 하는데…."

  "왜요? 일 더 주시게요? ㅎㅎ"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어렵게 입을 연 팀장님과 달리 이미 일어날 일을 예상하고 있었던 나는 곧바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연말에 본인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는 말에 "아, 그런 거 안 챙겨주셔도 되는데… 챙겨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ㅎㅎ"라고 답했다. 언급한 인센티브는 정말정말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이었다.




  팀장님이 첫 번째 면담자로 나를 택한 건 탁월한 전략이었다. 나는 다음 면담자에게 어떤 내용이 오고갔는지와 내가 제안에 수락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나와 같이 일하는 것에 호의적이었던 그 역시 특별한 반발없이 제안을 수락했고, 팀장님의 계획은 순항할 수 있었다.


  "어차피 나갈 거라서 딱히 상관 없는 거 알죠?"


  면담을 하고 돌아온, 4개월차 퇴사희망자는 웃는 낯으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가 퇴사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역시 업무 재배정의 수혜자였다. 그와 나는 경력을 이유로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일을 맡고 있었고, 그는 이 상황에 불만을 갖고 계속 퇴사하겠다고 팀장님을 압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퇴사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자신을 '어차피 나갈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죠?"


  웃으며 지난 이야기를 꺼내는 내게 옆자리 직원은 어리벙벙한 얼굴로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기대하고 예상했던 시나리오에 대해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저는 그 분이 떠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도 모르게 '그럴리가 있어요?'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 분 없이도 우리끼리 사업을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제서야 나는 그들이 전화를 가려받고 회피하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입으로는 "우리 안 짤리나봐요."라며 해고를 비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실제 그들이 세운 계획은 윗사람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사회초년생다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다.




  팀 내 인사는 자신의 고유권한이라고 자신하던 팀장님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업무를 총괄하는 분에게만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업무 재분장이 잦았던 팀 내에서 나는 별다른 이슈 없이 업무를 처리해왔던 몇 사람 중 하나였다. 딱히 업무를 재분장할 근거가 없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분이 다른 짱짱한 보직도 여럿 맡고 있었다.


  내가 담당하던 업무는 문제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끌고 왔고, 완전하진 않지만 힘이 많이 들어가는 밭갈이 과정도 어느 정도 끝났다. 그 사실을 팀장님 역시 몰랐을리 없다. 그렇기에 내 업무를 큰 부담없이 생초짜 신입에게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계획과 달리 팀장님은 그 분에게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다른 윗분의 예상치 못한 식사 제안으로, 지금 입을 다물어봤자 며칠 뒤에는 발각될 거란 걸 깨달았다. 팀장님은 마지못해 그 분에게 담당자 변경 사실을 고지했다.




  안정적인 상황에 변화가 발생하면 누구나 일정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현재 상황에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해방된 직원들의 얼굴에는 다시 미소와 설렘이 떠올랐지만 동시에 두통과 새로운 업무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왔다. 인수인계를 할 때마다 나는 늘 똑같은 얼굴을 한 신입직원들의 얼굴을 본다. 부디 너는 살아남아라.


  업무 재분장의 유일한 표면적 피해자는 나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다. 어쩌면 이건 업무가 더 줄어들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 기회에 업무시간에 책을 읽을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보지 않은 길에 무엇이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나는 그 길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길일 거라고 기대해보려 한다. 나쁜 길이었다고 판별되면, 그때 그만둬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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