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ULL Sep 18. 2022

수요 없는 공급

  "감사 업무에서 저를 배제했더라구요."

  "온라인 교육 저도 유튜브로 들었는데 끝나고도 안 오더라구요. 무슨 이야기했어요?"

  "의문 나는 거 있으면 저한테 물어본다고 하더라구요?"

  "선생님, 새 업무에 감사 업무까지 맡아서 괜찮겠어요?"

  "선생님 업무 많아서 소화 못한다고 팀장님한테 이야기했는데 경력이 많아서 괜찮을 거라고 하더라구요."

  "도와줄까요? 재작년에 내가 하던 업무라 금방 할 수 있어요."

  "우리는 같은 팀이고, 저는 선생님을 도와주려는 거예요."


  혼자 일하는 걸 선호한다고 여러 차례 말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내 일에 관심을 보이며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심지어 아무런 목적도 없이 내 자리로 와 내 모니터를 보다 가곤 했다. 정작 롤을 주면 아무 말도 없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롤이 지정돼서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의 반응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의 역할을 실제보다 부풀려 말하는 그를 보며 거짓말이 습관이 된 사람이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다.




  "팀장님이 교수님과 직접 커뮤니케이션하는 건 선생님한테 맡기라고 해서, 저는 그 분이랑 일해본 적도 있고 어떤 성향인지도 알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어요."


  변경 전 일 중에도 함께 하는 일이 있었다. 그 업무의 메인은 그였다. 그는 업무를 두 개나 맡겼다며(그 이야기를 듣는 나도 두 개였다) 불만을 표출했다. 팀내 직원 중에서는 연차가 가장 오래 됐고, 급여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었다. "선생님 역량이면 그 정도는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맡기신 거 아닐까요?"라는 제법 합리적인 추측으로 그를 달랬다.


  업무 절차가 어느 정도 정리될 쯤에는 내가 일을 해서 그에게 넘기면 그가 취합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교수님은 개별적으로 직접 자료를 보내달라고 했음에도 그는 그렇게 하길 바랐고, 나는 그저 그의 업무가 조금이나마 늘어난 것이 미안했다. 돌이켜보니 그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이 우위에 있길 바랐던 것 같다. 심지어 그는 교수님이 내게 업무상 말을 걸고 가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꼭 확인했다.




  감사 업무가 나에게 주어졌을 때 나는 다른 회의를 준비한다는 이유로 은근슬쩍 회의 자리에서 빠져나갔고, 은근히 빼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꺼냈으며, 인력이 굳이 필요없다면 지금이라도 나는 빼줘도 괜찮다고 말했다. 실은 예전에도 나를 어떤 업무에 투입하려 했다가 사내 분위기를 내세우는 팀장님에게 앞으로 시간외근무는 안하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빠진 일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좋았지.


  맡은 일은 책임감을 갖고 하지만, 기본적인 일도 줄이기를 바라는 마당에 추가적인 업무를 맡고 싶을 리 없다. 근데 그걸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정도면 속으로는 나에게 맡겨졌다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분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맡은 일을 하기 위해 야근해야 하는데 내가(야근 안함) 맡은 일도 하고 싶다? 도대체 왜? 언젠가 그가 "회사가 나를 이따위로 대하는데 계속 다녀야 돼요?"라는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


  나는 완벽하게 그의 거짓말에 휘둘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행정업무를 맡고 싶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진실이었을까. 팀장님에게 일관적인 분노를 보이는 걸 보면 그는 자신에게 발생한 모든 문제의 원인을 팀장님에게 미루는 것 같다. 행정업무를 맡고 싶지 않다는 (내 추측으로는) 빈소리를 받아주지 않아 자신의 역량부족이 드러난 것은 팀장님의 잘못이다.


  행정업무를 내려놓고 전년도에 맡았던 업무를 맡고자 했으나, 새로 행정업무를 맡게 되었으며 주도권을 쥔 직원과 팀장님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 몰랐는데, 나중에 와서야 그가 원하는 대로 업무분장을 했다면 스스로 같이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교수님과 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다 이유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면 왜 그렇게 집요하게 팀장님의 험담을 했던 거지? 그는 자신의 선언따위는 잊고 그저 자신에게 주요업무를 맡기지 않는 팀장님에게 계속 해서 불만을 가진 것이다. 자신을 배려해 업무분장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선생님 괜찮아요? 격앙돼 보이던데."

  "제가요? 격앙?"


  "반은 놀고 반은 일할 거라더니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예요?"

  "놀려면 초반에는 일을 다져놓아야지요~"


  그는 내가 괜찮지 않길 바란다. 그는 내가 열심히 하지 않길 바란다. 그는 나에 대한 평가가 떨어지길 바란다. 그는 내가 최소한의 부담만 주려고 맡긴 롤이 너무 하찮고 작은 것이 불만이었다. 그는 우리 둘 중에 자신이 메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나에게 주어진 감사 업무를 자신과 나누길 원한다. 주어진 일도 하기 싫고, 지금 주어진 일을 소화하기 위해 야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가 원하는 대로 그가 더 많은 일을 가져가고, 교수님들이 오로지 그를 통해서만 소통하고 싶어 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업무시간의 반만 일하고자 하는 나의 계획이 더 빨리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시작부터 잘못 됐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나자빠지길 기다릴 것이 아니라, 팀 전체와 기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나자빠지는 일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주요업무를 할당하는 건 내가 아니라 팀장님과 새로 행정업무를 맡은 직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뜻밖의 추석 선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