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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Sep 10. 2022

뜻밖의 추석 선물

  프리랜서를 꿈꾸며 퇴사한 지 일 년 육 개월만에 나는 다시 회사원이 됐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된 이후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고 싶었고, 지역에 기반을 둔 인간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새로운 직장에서 만난 동료들은 나보다 훨씬 나이가 어렸고, 내가 그렸던 그림은 실패했다. 독서모임을 앞두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그러면서 나는 지역에 기반을 둔 인간관계가 반드시 필요한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됐다. 비록 멀리 있지만 친구는 친구였고, 성향이 맞는 블로그 이웃들과의 소통도 즐거웠다. 집순이인 내가 지역에 친구를 만든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게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점점 더 희망을 버리고 포기 하고 있을 때 뜻밖의 손길이 찾아왔다. 내 입장에서는 특별히 다른 직원들보다 잘 해준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교육대학원 실장님이 몇 개 없다면서 주고 간 기념품 중에 내 몫이 있었다. 같이 입사한 것과 다름없는 교수님 한 분은 주지 않으면 잠을 못 잘 것 같다며 값이 꽤 나갈 것 같은 샤인머스캣과 음료세트, 처음 보는 브랜드의 칫솔치약세트를 주고 가셨다. 퇴근하는 길에 마주친 센터장님은 갑작스럽게 담당자가 바뀐 것에 대한 아쉬움을 전하며 그동안 잘해줬다고 격려해주셨다.


  이 커다란 조직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나는 어느새 이곳에 나도 모르게 내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모든 직원을 챙겼던 전 직장과 달리 보수적인 새 직장은 비정규직 직원들에게 김 세트 하나도 주지 않았다.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함께 일한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뜻밖의 추석 선물이 되어주었다. 예쁘장한 디자인의 칫솔치약세트는 팀원들에게 모두 나눠주었고, 음료세트는 함께 나눠먹기 위해 냉장고에 두고 왔다. 팀원들에게 등떠밀려 샤인머스캣은 집으로 가져와 가족들과 나눠먹었다. 추석이 추석다워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내 추측과 달리 나는 이곳에서 또 다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입사하자마자 깊은 유대를 쌓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거였다. 나에게는 언제 떠나도 아쉬울 것 없는 직장이지만, 어쨌든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미운 정 고운 정 쌓게 되는 게 회사라는 공간이다. 내가 퇴사한 회사를 이 년만에 찾아갔던 것도 그런 이유였으니까.




  이 주 뒤면 처음으로 독서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어쩌면 그 모임은 나의 성향에 맞지 않는 곳일지도 모른다. 다른 분이 그랬듯이 한 번만 참석하고 빠져나오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독서모임이 그곳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젠가는 나에게 맞는 독서모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예 독서모임이 아닐 수도 있다.


  퇴사 후 내가 낸 세금을 돌려받는 일에 꽤 열심이 되었다. 얼마 전에는 근로장려금을 50% 받았다. 생에 최초로 국가에서 받은 돈이었다. 내일배움카드도 신청했다. 아마 절차에 이상이 없다면 다음 주말부터는 포토샵 기초과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도 또 누군가를 만나게 되겠지.


  세상 밖으로 나가야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기대했던 형태로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섣불리 실망하지 않으려 한다. 아마도 나는 생의 마지막을 이 지역에서 마무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나의 의지이기도 하고, 가족들 또한 다시 떠나보낼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러니 결국은 이곳에 스며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원히 사람 구실 못할 것 같던 내가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했고, 육 개월을 버텨 추석 연휴를 맞이했다. 나는 이곳에 더 많은 추석을 맞이할 수 있길 고대한다. 회사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처리 방식은 전 회사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이곳에서 내가 정착할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그것 하나 때문에 이 회사를 다니는 건 아니다. 나도 내 나름대로의 기준이라는 건 있으니까. 그 기준 중 하나에 소외되지 않는 것, 겉돌지 않는 것, 스며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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