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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Oct 22. 2022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쌤, 바빠요?"


  부서 내부 사정으로 약 한 달 전쯤에 업무조정을 한 후 내 업무를 인계 받은 팀원이 소근거렸다. 며칠 전 팀장님에게 직접 면담요청하고 회의실로 들어가 한참이 지나서 돌아오는 걸 봤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업무량 때문에 힘들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면담일 게 뻔했다. 하지만 옆에서 너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니 그 일이 잘 해결됐는지 스물스물 걱정이 올라와서 "팀장님한테는 말 해봤어요?"라는 말이 토하듯 나오고 말았다.


  "팀장님이랑 무슨 이야기했대요?"


  바로 전 날 산책 겸 팀원들이 마실 음료를 사러가는데 같은 센터 업무를 맡은 직원A가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사실상 팀 내에서 배척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나를 통해 정보를 얻고 있었다. 나는 업무분장에 대한 이야기일 게 뻔하고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서 딱히 묻지 않았으며, 그다지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어린 여직원 셋이 같이 면담했으니 업무를 셋이 나누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거기까지가 나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어린 직원들의 생각은 언제나 내 추측을 뛰어넘었다. 세대 차일까? 팀장님의 생각은 내 예측대로 돌아갔지만 어린 직원들은 아니었다. 실제 나는 어린 직원들보다 팀장님과 나이 차가 덜 난다(한 살이라도). 본인들 내에서 업무분장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정말 기상천외한 결정을 했다. 그들은 자신들 내에서 업무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원A에게 업무를 넘기고 싶어 했다.


  "요즘 팀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 있지 않아요?"


  직원A가 이 말을 했을 때 나는 다들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팀장님이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들고 생각이 딴 데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집안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치 못했다. 직원A는 자신과 관련된 일에 눈치가 빠르다. 그가 다른 팀원들의 면담에 대해 물은 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팀의 공기를 읽고 있었다. 나는 면담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게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직원A는 내 파이다. 같은 센터를 맡고 있고, 나에게 업무량이 많은 일들이 몰려 있다. 팀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직원A만 외면하고 있다. 업무를 조정하려고 할 때 그는 "일시적으로 업무가 몰리는 거 아니냐. 자신이 교수님에게 연락하지 않는다고 업무가 없는 것이 아니다. 결정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나는 그가 노골적으로 업무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선생님이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주려고 가만히 있었어요."


  그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요업무에는 도와주겠다고 매달렸던 그다. 적당히 숟가락을 얹으려고 시도하는 그에게 업무를 제대로 맡기자 그 뒤로는 아예 도와주겠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눈에 띄게 적고 쉬운 일을 맡으려고 하는 탓에 나뿐만 아니라 팀 전체의 눈밖에 나버렸다.




  팀장님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벌써 몇 번째 업무조정인지 모르겠다. "그 분들이 업무량을 소화할 수 없을 텐데요."라고 나와 직원A가 말했을 때 그 말에 귀기울여야 했다. 간과하지 말아야 했다. 팀장님이 직원들의 업무량과 역량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그건 이 업무분장에 기여했던 직원 역시 마찬가지다. 조용히 일하고 있으면 모른다. 조용한 게 당연하니까.


  내 파이에 손을 대면서 먼저 상의하지 않은 건 좀 예의 없었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내가 그 업무를 다 떠맡는 건 당연하다는 건가. 내 업무역량 때문에? 돈은 비슷하게 받는데 왜 내가 더 많은 일을 하는 게 언제나 모두에게 당연한 건지 모르겠다. 나는 딱히 인정 받고 싶다거나 이 조직에서 어디까지 가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닌데(심지어 요즘은 그만둘 생각도 하고 있다).


  뭐 어차피 내 성향 상 건들이지 못할 파이였다. 포기한 파이다. 이 일에 엮이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지금은 정신건강에 좋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직원A는 작은 개울물을 피하려다 큰 파도를 만날 위기에 처했다. 나는 그를 쉽게 포기했지만, 어린 직원들은 한 번 문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그들은 이 회사에서 경력도 제일 많고, 연봉도(큰 차이는 안 나지만) 제일 많이 받는 그가 노닥노닥하는 걸 봐줄 생각이 없다. 모르겠다. 이런 상황을 뭐라고 해야 할지. 자업자득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적반하장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나에게 예의 없다는 건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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