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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Oct 31. 2022

약 없이 처음 바깥 활동을 하다

  "너 어디야? 집에 있어?"


  평소답지 않게 너무 여유 있게 준비를 시작해서였을까. 나는 방향성을 잃었고, 정신 차려보니 봉사활동 출근(?) 시간이 30분 정도 남은 상태였다. 하필이면 지역 축제기간이었다. 프로쇼퍼이자 이제 프로 레이서의 호칭을 추가한 여동생은 1분을 남겨놓고 도서관 앞에 나를 내려줬다.


  그날 가지 않았다면 큰일날 뻔 했다. 도서관에서는 서가를 미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었고, 2시간 반 동안 빡세게 일한 후에는 쭉 휴식을 취하다가 퇴근했다. 집에 도착해 책을 읽고, 블로그를 끄적이며 여유를 즐기다가 나는 문득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약을 먹지 않은 채로 정상적으로 바깥활동을 무사히 마쳤다. 일시적인 일일지 모르나 나에게는 상당히 고무적이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최근 약을 줄이거나 먹지 않으면 나타나는 현상이 단순히 내가 아프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 정신과 약을 먹다가 끊으려고 하면 부작용이 나타난다. 아파서 약을 더 먹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약을 줄이거나 끊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어느 정도 이겨내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주말이 오면 나는 남몰래 혼자만의 실험을 시작했다. 실험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다음날도 연휴인 주말에 약을 먹지 않아도 대부분 이상 없이 생활이 가능하다.

  2. 출근 전 연휴에도 출근시간이 임박하는 오후 또는 저녁부터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3. 외부활동을 하는 주말에는 평일처럼 약을 먹어야 한다.

  4. 약을 먹지 않거나 줄여서 먹은 상태에서 출근한 첫날은 오전 또는 퇴근할 때까지 부작용이 나타난다.


  정신이 없어서 약을 잊고 외출한 적은 있다. 하지만 나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증상이 나타나고, 비상약을 항상 들고 다니기 때문에 종류와 양의 차이는 있더라도 단 한 번도 약을 먹지 않고 바깥 활동을 한 적은 없다. 최소한 바깥 활동 후 집에 돌아와서라도 약을 복용해야 한다.




  실험 결과에 위배되는 첫 사례가 발생하면서 나는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질문에 확신의 방점을 찍었다. '회사가 나에게 스트레스가 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나는 "YES"의 도장을 찍었다. 원래 머리 쓰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몸 쓰는 일을 더럽게 못해서 머리 쓰는 일을 하고 있을 뿐. 도서관에 책 정리만 하는 일이 있다면 그런 일만 하고 싶다. 단순노동 좋아.


  언젠가부터 묘하게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마음이 뜨기 시작했다. 원인은 정확히 모른다. 딱히 회사가 싫어진 것도 아니고, 도서관 이용이라는 가장 중요한 장점도 여전히 내게는 유효하다. 특별히 일이 싫어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어느 순간 좀 재미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회사에서 원치 않을 때까지 계약직으로 이 일을 쭉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생각이 사라졌다. 약을 먹으면서 회사를 다니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이 일이 나에게 스트레스가 된다면 나는 이 일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싶다. 그리고 다른 일을 하고 싶다.




  살면서 실업급여를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내일배움카드도 써본 적이 없다. 계약직이 되어 나는 내일배움카드로 일러스트 기초 수업을 몇 주 전까지 수강했다. 이번에는 실업급여를 받아보는 새로운 경험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이것도 계약직이기 때문에, 계약만료일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대학에서 일하면 내가 다시 아플 수도 있다는 엄마의 걱정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사람이 스트레스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약을 먹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재밌는 일을 하고 싶다. 나는 오락가락하던 마음을 굳혔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건 2월, 계약만료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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