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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Nov 04. 2022

꼰대라는 공통점

  "저는 재계약을 안할 거라서요."


  처음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혔을 때는 팀장님에게 당장 말해서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팀장님의 휴가와 회의로 말할 타이밍을 며칠 연속 놓친 뒤에는 굳이 미리 말해 팀장님을 심란하게 하고, 나 역시 설득 당하는 시간을 늘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1월에 말하기로 하고 잊었다.


  그런데 팀장님이 먼저 면담을 요청했다. 사무실 안에서 이야기를 꺼내셨던 걸 보면 큰 부담을 갖고 시작한 면담은 아니었던 듯했다. 팀장님은 내게 일이 과중되어 있으며, 내년에는 사람을 충원해서 일을 덜어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서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는 뒤통수를 치는 인간이 될 것 같아서 나는 재계약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혔다.


  내가 재계약을 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 성향이 맞지 않은 사람들과 너무 밀착해서 일함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누적되고 있는 걸로 추정된다. 둘째, 조직이 팀 단위로 폐쇄되어 성향이 맞는 사람들과 만나 스트레스를 풀 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힘들다. 셋째, 팀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사람을 내게 붙여 내가 보완해주길 바라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런 역할을 하길 원치 않는다. 그러면서 그럴 거면 연봉 훨씬 많이 주는 데 계속 다니지 여길 오진 않았을 거란 말도 덧붙였다. 또한 내 업무 때문에 사람을 충원하는 건 필요 없다는 말도.


  팀장님은 몹시 당황했다. 본인 스스로 지금 당장은 나를 설득할 만한 제안이 전혀 떠오르지 않고, 멘붕이 와서 더 이상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나는 설득할 제안을 생각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마시라고 답했다. 점심시간에 팀장님은 뜬금없이 사무실을 본관으로 이동할까라는 본인도 원치 않는 이야기를 해서 팀원들을 황당하게 했다. 내가 사무실의 폐쇄성을 이야기해서 그러시나 해서 공연히 찔렸다.




  그날 오전에는 무계획적인 교수님이 싼 똥을 치우느라 바쁜 와중에 두 시간을 소모했다. 나는 일이 진행되는 걸 방해하는 행위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최근 학생들을 포함해 전화도 많이 하다보니 목소리가 갈라지는 일도 빈번하게 나타났다. 교수님도 위험신호를 읽은 모양인지 괜찮냐고 물으며, 내가 즐겁게 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게요. 그게 참 쉽지 않네요, 교수님.


  처리해야 할일들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다보니 퇴근시간이 조금 늦어졌다. 나가려다가 행정담당 직원(사실상 사수)인 젊은 꼰대와 대화가 시작됐다. 그렇게 나의 퇴근시간은 다시 두 시간 늦어졌다. 일전에도 이런 일이 몇 번 있었기에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신기하지도 않았다.


  꼰대와 젊은꼰대는 통하는 걸까. 그와 나는 이 사무실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사무실에 둘 또는 소수가 남게 되면 쌓여 있던 이야기를 쏟아내며 서로를 이해하고 도닥여주고 그러면서 다시 힘을 얻곤 했다. 그와 나의 성향이 일부 비슷하고, 자리가 가까워 서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는 것도 공감을 쌓는 데 도움이 됐다.




  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잠깐이지만 이런 식이면 계속 회사를 다녀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첫 번째 이유의 일부와 세 번째 이유의 원인이 재계약 시점에는 제거될 예정이라고도 했다. 두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그 역시 해결방법이 없다는 것에 대해 인정했다.


  입사 초기에 학생 티를 벗지 못했던 어린 직원들은 여전히 학생 티를 벗지 못했다. 오히려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업무를 하면서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들으면 그걸 행정직원이나 팀장님에게 '일렀다'. 그리고 그 빈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자 행정직원은 자신이 요즘 예민해서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줄 알고 혼란스러웠는데 다른 사람 눈에도 그게 보였다니 안심이 된 모양이었다. 그는 열심히 가르친 신입직원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고, 자신의 교육방식이 맞는지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다. 우리는 이래서 사수들이 인수인계를 안해줬나보다라고 한탄했다. 혼자 파다보면 확실히 업무능력이 크게 늘어나는 경험을 우리는 해봤으니까.




  그에 대한 연민과 잠깐의 흔들림이 있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시도해볼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회사를 다니는 일은 아니니까. 그냥저냥 무난하게 사는 거 말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찾고 싶다. 좀 더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각자의 무게를 이겨내야 한다. 이해는 이해의 영역으로만 남겨두고 각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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