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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Dec 07. 2022

회사 언제 그만 두세요?

  "회사 언제 그만 두세요?"


  의사에게 이 질문을 듣는 순간, 회사를 그만둬야 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면 이전과 같은 상황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너무 늦지 않게 탈출해야 한다. 어디서부터 엉켜버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순간은 늘 똑같다. 바로 나에게 모든 일을 떠맡기고 싶은 열망이 아주 강한 상사를 만났을 때다.


  "○○쌤 도망갈지도 몰라~."


  라는 말 다음에도 일은 더해지고 더해졌다. 내가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 챈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일을 미루다가 결국은 내 이름이 거론됐을 때, 이제 더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들은 모른다. 내가 이미 팀장님에게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보다 더 일찍 이 곳을 떠날수도 있다는 것을.




  주말마다 두 군데 도서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이 작은 도서관과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남몰래 좋아하고 있었다. 내심 이곳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주말근무도(도서관은 다 주말근무를 한다), 밤근무도 괜찮았다. 이런 자리가 아니면 경력도 없는 나를 받아줄 도서관이 없을 것이다.


  사실 이곳에서도 나를 받아준다고 한 적은 없다.


  우연히 채용 공고를 보긴 했지만 나는 금방 포기했다. 그때는 실업급여를 받을 때까지 그럭저럭 다닐 만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가랑비에 야금야금 젖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뻥- 하고 터져 버리고 말았다.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임계점에 도달하고 만 것이다.


  병원에 다녀온 이후 나는 포기했던 도서관 원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동생은 힘들면 실업급여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 지금 당장 그만두라고 했지만, 나는 실업급여가 너무너무너무 받고 싶었다. 국가에 따박따박 세금만 내고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 백수가 되면 세금을 타먹을 기회를 놓치기 싫어지는 법이다. 무엇보다 나를 다시 한 번 시험하고 싶었다. 도서관에서는 내가 괜찮을 수 있는지 테스트하고 싶었다.




  아무도 나에게 기대하지 않는, 기대할 게 없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 도서관 연장에 의해 채용되는 계약직은 "아마도" 행사 같은 걸 기획하거나 전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성실하게 주어진 일을 하면 된다.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 그런 곳을 찾고 싶다. 나의 가치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는 곳. 내가 숨을 수 있는 곳.


  다시 대학에서 일하면서 본부를 택하지 않은 건, 본부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농담 섞인 제안을 거절한 건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업단을 선택한 것도 사업의 주체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대학은, 일하기 싫은 사람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 바람에 본부에서 해야 할일을 사업단에서 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해서 생겼다. 9월에 업무를 변경한 이후에는 기획과 실행, 이 둘을 모두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 기획 토해내는 자판기 취급을 받고 있다. 문제 상황을 던져놓고 당장 해결책을 내놓으라는 식이다. 아놔, 누가 보면 비단주머니 맡겨놓은 줄 알겠네.




  오후 반차를 내고 도서관에 원서를 냈다. 봉사활동을 할 때 나를 좋게 봐준 분이 감사하게도 아는 체 해주셨다. 하지만 서류를 접수하는 분이 도서관 경력 증명서는 없냐고 질문하는 순간 서류심사에서 큰 점수가 댕강 날아가는 게 보였다. 나는 도서관 근무 경력도 없는 주제에 풀타임 잡에 지원하는 건방진 지원자다.


  그래도 나쁠 건 없다. 도서관에 합격한다면 나는 드디어 도서관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나를 마른 걸레 짜듯 쥐어짜는 무리들로부터 빠르게 탈출할 수 있을 것이고, 불합격한다면 세 달 정도 뒤에 실업급여를 받으며 즐거운 백수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어쨌든 기승전-실업급여다.


  실업급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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