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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Nov 27. 2022

솔직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퇴사할 건데 뭐하러 신경 써요? 그냥 신경 쓰지 마요."

  "선생님은…. 진짜 퇴사할 거예요?"

  "… 몰라요. 그때 가보면 알겠죠."


  나는 퇴사할 것이다. 굉장한 이변이 없는 이상 그렇게 할 것이다. 이것은 99.5%의 확률이다. 하지만 그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지 않다. 나의 솔직함으로 그가 위로를 받거나 동지애를 느끼는 따위의 빌미나 시간을 조금이라도 내주고 싶지 않다. 나는 그를 끝까지 불안하게 만들 것이고, 동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퇴사하는 것이 아니라 해고되는 것이다. 그가 회사에 분노를 쏟아내며 퇴사하겠다고 으르렁댄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 회사가 그만두지 못하게 한다는 말을 일 년 내내 하고 있다. 자존심 때문이라기엔 너무 위선적이다. 이 말을 지금까지 백 번은 넘게 들은 것 같다. 진실을 알고 난 후 그 가식적인 모습에 역겨움을 느낀다.


  "팀장님한테 재계약 안할 거라고 이야기했어요."

  "팀장님이 뭐래요?"

  "지금 당장은 저를 설득할 요인이 없다고, 멘붕 오셨다고 하셨어요."


  그는 아무 말이 없다. 지금까지 수백 번 이야기한 '팀장님이 퇴사를 못하게 한다'말의 진실이 흐려지는 걸 그 순간 그도 나도 깨달았다. 팀장님은 그의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았지만, 그를 설득하기 위한 어떤 제안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꼬여버린 상황 때문에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그 역시 알고 있다.




  "○○에서 직원 뽑는다고 해서 "제가 갈까요?" 했더니 "A쌤이 오면 나야 좋지~"라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곧바로 이 말을 덧붙인다.


  "근데 팀장님이랑 싸우기 싫다고 이야기하시더라구요. 팀장님이랑 친한 분이거든요. 그리고 다른 부서로 곧바로 옮기는 건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다른 회사에 1~2년 다니다가 와야 된대요."


  '혓바닥이 길다'는 말의 의미를 그를 보며 체감한다. 진짜 팀장님과 친하다면 그 말은 완곡한 거절의 표현일 뿐이다. 다른 부서로 곧바로 옮기는 게 안 된다면 그는 어떻게 십 년 동안 같은 회사에 다닐 수 있었을까. 자가당착적인 말인 걸 알면서도 나는 묻지 않았다. 그의 혓바닥이 더 길어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




  그는 이제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다. 뒤가 없는 사람의 발악. 두 번 다시 이 조직에 발을 들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의 발악을 나는 목도한다. 그는 팀장님과 팀원의 사이를 대놓고 이간질한다.


  "팀장님이 이길 수 있겠어요?"

  "팀장님이 그러시면 저희가 힘들어요."


  그는 팀장님이 무능해서 팀원들이 고생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신입직원들 사이에 퍼뜨리고 있다. 잔잔하고 은밀하게 신입직원들의 뇌는 오염된다.


  그는 괴물 같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가오나시가 떠오른다. 모든 것을 먹어치운 후 검고 물컹대고 끈적이는 폐기물을 마구 쏟아낸다. 정상의 비정상화를 목도하며 방어해봤지만 그의 벽은 완고하다. 퇴사일이 다가올수록, 체념할수록 그는 업무적으로 무기력해지는 동시에 더욱 거대한 괴물이 다. 그게 그의 삶의 방식이자 복수 방법이다.




  "어차피 퇴사할 건데 신경 쓰지 마요."


  불평, 불만은 그만하라는 뜻이다.


  "선생님은 확실하게 퇴사할 거예요?"


  그는 동지를 찾고 있다. 야근 보고를 할 때도 혼자 신청하면 왕따인 줄 알 거라던 사람이다. 혼자 퇴사해서 왕따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이 악물고 버티고 싶다. 그의 마음이 편해지는 데 조금의 도움도 되고 싶지 않다.


  내 인생을 남 엿 먹이는 데 쓰면 안 되는데(절레절레).

  직장생활은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인간'이 문제다. 나는 이곳에서 '인간혐오'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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