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라도 될 걸 그랬어
"XX야, 거기 있는 그것 좀 가져올래?"
"??????"
"아니 왜 거기 그거 있잖아.."
"엄마,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언제부터인가 종종 듣는 소리입니다. 변명을 하자면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있는데, 쉬이 단어가 되어 입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맘은 급하고 하니 일단 내뱉고 봅니다.
회사원, 엄마, 주부, 며느리 등등 맡고 있는 역할이 많다 보니 해야 할 일도, 챙겨야 할 일의 가짓수도 월등히 많습니다. 게다가 나이를 먹으면서 뇌가 노화되고 체력이 떨어져서인지 집중력, 주의력이 떨어집니다. 저녁 반찬 뭐하지 하다가도, 참 빨래해야 하는데, 애들 학원비도 내야 하고, 아차차 다음 주 어머니 생신이라 식당도 예약해야 하는데.. 이런 식입니다. 이러다 보니 머릿속에 있는 '그 일'을 남들이 알아들을만하게 구체적으로 표현할 여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사실 대충 말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효율을 추구하고, 집중력은 제한된 자원입니다. 대충 말해도 되는 사람에게는 어찌어찌 넘어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대충 말해도 넘어갈 수 있는 관계는 부모→자녀 간뿐만이 아닙니다. 상사→부하직원도 있습니다.
예전에 모신 모 팀장은 지시대명사를 편애했습니다. 그가 뱉은 모든 문장은 지시대명사가 팔 할이었습니다.
"그... 그거 있잖아, 그거 내가 아까 말한 대로 그렇게 한 다음에 이렇게 해서 가져와봐."
그가 업무지시를 내릴 때마다 팀원들은 중지를 모아 그의 발언을 해석하려고 애씁니다. 전체적인 맥락과 과거의 이벤트, 팀장님의 개인적인 컨디션까지 총동원해가며 하나씩 퍼즐을 완성해 갑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팀장님은 말을 왜 이리 알아듣지 못하게 할까. 하지만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됩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얼른 단어로 연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팀장님의 나이가 저보다 조금 더 많거나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힘의 역학관계입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줄 부하직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상사에게 '그건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말했다간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라는 반응이 나올 겁니다. 제 동기 한 명은 '팀장이 되어 좋은 건,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물어볼 수 있는 거야'라고 했다죠.
그렇다면 왜 몇몇 상사들은 업무지시를 불분명하게 하는 걸까요? 그래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큰 대과 없이 업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헤아려보면 대략 세 가지쯤으로 추려집니다.
첫째, 앞서 말한 대로 나이가 들어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말을 구체적으로 하는데 에너지가 많이 드니까 에너지 절약 모드로 가는 것입니다. 마치 배터리가 얼마 안 남은 구형 스마트폰과 같습니다.
둘째, 스스로도 핵심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뭔가 업무지시는 해야 되는데, 큰 그림이 없는 상태에서 지시를 하다 보니 본인이 횡설수설 말하면서 생각을 정리해 나가기도 합니다. 문제는 머릿속에만 있어야 하는 과도기적인 생각이 말로 나오면서 부하직원은 헛힘을 쓸 수도 있다는 겁니다.
셋째, 욕을 먹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업무 지시를 하면 잘못될 경우 본인의 책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호하게 말해야 나중에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는 거죠. ('내가 말한 건 그런 뜻이 아니야, 네가 오해한 거란다')
(브런치매거진) 육아에서 배워서 회사에서 써먹기 "6. 악역은 누가 할래? 나는 뒷짐 지고 있을게" (https://brunch.co.kr/@sumerians/12) 에서 자세히 썼습니다.
명확하게 지시를 하지 않으면 소통의 오류로 부하직원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커집니다. 불필요한, 혹은 잘못된 방향으로 업무를 진행한다면 부하직원의 시간과 노력은 낭비되고 최선의 성과를 내기가 힘듭니다. 회사 전체로 봐도 손해입니다.
'AI 분석으로 발견한 상위 5% 리더의 습관(고시카와 신지 저)'이라는 책에서는 '지시대명사를 쓰지 않는' 것이 성공한 리더의 습관 중 하나라고 소개했습니다.
이처럼 얼굴을 마주 할 수 없는 비대면 시대에 협업을 해서 성과를 올리려면 정확한 의사소통이 중요하다. 실제로 상위 5% 리더는 자칫 소통의 오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시대명사(이것, 그것 저것)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시작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다고 남도 알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궁예가 아니니까요. 어떻게 구체적으로 지시해야 좋을까 고민될 때는 부하직원에 빙의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부하직원이었던 시절이 있었잖아요. 우선 지시대명사를 쓰지 않는 것부터 해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