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식도 마음대로 안되는데 부하직원은 오죽하랴

by 수메르인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 삼년씩 했더니 보살이 되었습니다

벙어리 삼년, 장님 삼년, 귀머거리 삼년 했더니 보살이 되었습니다


근무 중에 둘째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집에 왔는데 목말라요.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고 싶어요. 근데 집에 물 밖에 없어요"

"그럼 슈퍼 가서 사 오렴"

"근데 나가기는 싫어요."

'어쩌라고..'


부아가 치밀지만 가까스로 냉정을 되찾고 대답합니다.


"냉장고 안에 오미자 진액 있지? 그거 1:5로 물에 타서 냉동실에 있는 각얼음을 넣어서 마시렴"


오늘도 이렇게 불가능해 보였던 미션을 완수합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십 년간, 내 자식이니까 참지... 하며 화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적이 제 머리카락 숫자만큼 됩니다.


신생아 때는 밤낮 구분이 없고 말도 못 하니 하루 종일 울음소리만으로 배고픈지, 졸린지, 어디가 불편한지 헤아려야 했습니다. 말없이 혼자서 3년 내내 운영하는 24시간 편의점과 같습니다. 벙어리 삼 년입니다.


만 세 살쯤 되면 의사 표현은 하지만, 말귀를 못 알아듣고 천방지축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니 눈앞이 캄캄합니다. 장님 삼 년입니다.


만 육 세가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머리가 컸다고 반항하니, 정녕 내 말이 안 들리나 싶습니다. 귀머거리 삼 년입니다.


아이들은 학원 숙제도 힘들고, 유튜브 보면서 놀고 싶은데 엄마가 못하게 하니 뿔이 납니다. 퇴근하면 집은 엉망이 되어 있고 아이들은 틈만 나면 스마트폰을 보는 게 마음에 안 듭니다. 일찍 자라고 해도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어쩌겠어요. 제가 낳은 제 자식인데요. 하루하루 내려놓는 연습을 합니다.


그에 비하면 제 부하직원들은 감사하게도 엄연한 성인이고 최소한 말귀는 알아듣습니다.




팀원에게 화를 내어 무엇하나


'보살'


전에 있던 팀에서 팀원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저의 최대의 장점은 평정심이라고 합니다. 업무를 처리할 때 (일을 잘하건 못하건) 큰 감정 동요 없이 비교적 일관된 반응을 보입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긴장을 안 하게 된다 하고요. 물론 타고난 성격도 일부 도움을 줬겠습니다만, 사실 육아하면서 얻은 인내심이 근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쓴 보고서를 상사에게 가져갔는데 혹시나 맘에 들지 않아 화를 내지 않을까 조마조마합니다. 화를 내는 쪽은 이유가 있겠지만, 화를 당하는 편은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예상치 못하게 화를 맞게 됩니다. 이것은 과도한 불안의 원인이 됩니다.


몇 달 전 회사에서 조직관리자를 대상으로 연수를 실시했습니다. 설문조사를 해보니 관리자가 되어 가장 어려운 점은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관리자도 사람인지라 감정의 지배를 받습니다. 특히 팀원의 퍼포먼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감정적으로 접근하여 화를 내는 팀장들이 있습니다.


십여 년 전 모셨던 부장님 이야깁니다. 부하 직원 일하는 게 맘에 안 들 때마다 '쓸모없으니 창문에서 뛰어내리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사무실은 10층이었습니다) 부하직원에게 폭언하는 게 종종 있던 시대이긴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분은 자녀가 없었습니다. 세상엔 내 맘대로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면 화를 덜 냈을까요?


반면 저의 경우는 큰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고 수정할 내용만 피드백을 주는 편입니다. 물론 저도 부하직원 일하는 게 맘에 안 들 때가 있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그렇습니다. 화가 안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동시에 화를 내봤자 뭐하나 하는 체념의 마음이 함께 듭니다. 어차피 팀장-팀원은 일로서 만나는 사이입니다. 팀의 목적을 달성하는 게 우선입니다. 팀원에게 화를 내서 자존심을 건드려봤자 도움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서른 살 정도를 넘으면 가치관이 확립되어 나이를 먹을수록 확증편향만 찾을 뿐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안 고칠 사람은 안 고칩니다. (이건 남편과 십여 년을 살면서 깨달은 지혜입니다) 고칠 자세가 되어 있는 팀원에게는 제가 심하게 질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객관적인 피드백을 주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굳이" 내 에너지 써가면서 화를 내어 무엇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저의 에너지는 회사원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등등 나눠 쓸데가 많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허투루 낭비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나간 일은 "아무렴 어때", 다가올 일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 있을까"라는 에너지 절약의 자세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요새와 같은 탄소중립 시대에 걸맞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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