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은 누가 할래? 나는 뒷짐 지고 있을게

by 수메르인

아이가 알아서 화장실에 가는 평행우주는 없는가


"엄마~ 쉬 마려워요~"


주말을 맞아 장 보러 간 대형 마트의 한 복판에서 아이가 귀에 속삭입니다. 참사가 멀지 않았습니다. 막으려면 수분 내에 아이를 화장실에 데려가야 합니다! 다년간의 경험이 다른 쪽 귀에 속삭입니다.


"그러게 아까 진작 화장실에 가지 않고!"


화를 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알아서 진작 화장실에 갈 수 있으면 아이가 아닙니다.

(이러한 경험은 팀원들 앞 평정을 유지하는 데 유용합니다. 최소한 그들은 알아서 화장실에 갈 수 있습니다)


급히 화장실을 찾아 헤맵니다. 다행히 저기 하나 보이네요. 그런데.. 기다리는 줄이 꽤 깁니다. 저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빠밤 빠 바밤 빠 빰밤 바 빰 바바 밤~ 그래 결심했어!


(평행우주 A)


문화 시민답게 줄 맨 뒤에 섭니다. 아이는 쉬가 마려워 발을 동동 구릅니다. '조금만 참자~'며 아이를 달래 봅니다. 어느덧 이제 한 사람만 기다리면 되는데... 아이가 바지에 쉬를 하고 마네요.


그나마 마트인 게 다행인가요. 반바지를 한 장 사서, 아이에게 갈아입고 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산 바지가 꽤 됩니다.) 아이는 공공장소에서 소변을 봤다는 충격으로 넋이 나갔습니다. 속옷도 없이 태그도 안 뗀 새 바지만 입은 채로 차에 타려니 아이가 찝찝하다고 연신 외칩니다.


(평행우주 B)


"아이가 화장실이 급해서요.. 죄송합니다.."


아이를 데리고 새치기를 합니다. 아이가 무사하게 소변을 봅니다.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는 저를 맘충이라고 욕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저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인지부조화가 옵니다. 하지만 저는 엄마로서 선택을 했고, 그렇기 때문에 비난도 제가 감수할 몫입니다.


변명이겠지만 지나치게 이기적인 것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기죽지 말라고 소란을 피우게 놔두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항상 분별 있게 행동하려고 노력하지만 역시 적정한 선을 긋기는 어렵습니다.



누군가 악역은 해야합니다


누구나 악역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갈등 상황은 꼭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한테는 아군이지만 상대방이 보면 악역입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테면 팀과 팀 사이에서 업무 분장이나 책임 소재가 모호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가만히 있으면 그야말로 가마니가 됩니다. 다른 팀에게 욕을 먹을지언정 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할 때가 있고, 그건 팀장이 할 일입니다. 귀찮은 일 하기 싫고 나쁜 사람이 되기 싫다고 팀원에게 미루면 안 됩니다.


또한 팀원이 업무를 잘 못해서 수습을 해야 할 때, 팀장이 앞장서야 합니다. 팀장의 업무는 팀원의 관리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상사 앞에서 본인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누구든지 싫어합니다. 자신이 무능하다는 낙인이 찍힐까 봐 걱정도 됩니다. 하지만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실수를 잘 수습하고 무마하는 것이 직장인의 능력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오래전 제가 모셨던 상사 중 한 분은 유리 멘털의 소유자였습니다. 본인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제가 거래처와의 일에서 한 번 실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래처 직원이 저희 회사를 방문했습니다.


"제가 아니라 이 직원이 잘못해서 일이 이렇게 된 겁니다."


라고 상사가 말을 꺼냈습니다. 물론 제가 잘못했던 일이 맞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따로 불러 관리자로서 질책을 하고 피드백을 주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거래처가 보기에 상사와 저는 저희 회사라는 한 덩어리입니다. 책임을 저에게 전가한다고 저희 회사가 잘못한 일이 아닐까요? 상사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따로 구분해 줄까요? 책임을 부하직원에게 미뤄버리는 건 오히려 상사의 관리 소홀을 거래처 앞 드러내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관리자는 이런저런 상황에서 악역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팀원보다 월급을 더 받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혜택을 더 받는데 일도 더 편하면 팀원의 신뢰를 얻기 힘들 겁니다.


그런 점에서 몇 년 전 모셨던 또 다른 상사의 부임 인사는 인상적이었습니다. 관리자의 역할을 함축하는듯한 한마디였습니다.


“다른 부서랑 싸움은 내가 할게. 일은 누가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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