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면을 처음 먹어본 것은 열 살쯤이었다.
비빔라면이 지금처럼 대중화되지 않았을 때였다. 비빔면은 계절음식으로 여겨졌고, 여름 한철에만 슈퍼에서 팔았다. 지금이야 여러 상표의 비빔라면이 있지만 그때는 팔도비빔면이 유일했다. 통상적인 라면과는 다르게 국물이 없었고, 면은 시원했고, 양념은 새콤달콤매콤했다. 비빔면은 곧 나의 최애 음식이 되었다.
우리 집은 베지밀 두유를 배달시켜 먹었기 때문에, 베이지색의 유니폼을 입은 야쿠르트 아줌마가 매일 오후 방문했었다. 베지밀은 고소한 맛 A를 시켜 먹다가, 그게 물릴 때쯤이면 달콤한 맛 B로 바꿨다. B를 한참 마시다가 물리면 또 A로 바꾸는 무한대의 루프였다.
여름에 들어서면 야쿠르트 아줌마를 통해 비빔면을 박스채로 주문할 수 있었다. 내가 비빔면을 너무 좋아하니 엄마가 주문해 주었다. 겨우내 양식을 비축한 일개미처럼 든든했다. 여름이 지나면 맛보지 못할 별미였기 때문에 더욱 소중했다.
끓이는 건 오롯이 내 몫이었다. 나는 그때 열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화기에 더욱 신중해야 했다. 일단 편수 냄비에 수돗물을 채워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물이 끓으면 비빔면 봉지에서 면만 꺼내 반으로 부수어 넣었다. 대충 눈으로 보아 면이 투명해지면 익은 것이었다. 이제부터가 제일 중요했다. 양손으로 편수냄비의 손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개수대에 미리 준비해 놓은 채반에 부었다. 식지 않은 면을 바로 만지면 화상을 입기 때문에, 우선 찬물을 틀어서 그 상태로 식혔다.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손으로 구석구석 헹궜다.
고명은 삶은 달걀과 오이채였다. 비빔면은 꼭 오이채와 참기름 한 방울을 곁들여 먹어야 한다고, 엄마는 끓여주지도 않으면서 훈수를 두었다. 이윽고 한 입 넣으면 맵고 시고 단 맛이 미뢰에서 춤을 췄다. 황홀하도록 맛있었지만 열 살이 먹기엔 너무 매웠다. 그래도 꾸역꾸역 먹다가 결국에는 쓰라린 배를 움켜쥐며 기어이 한 그릇을 다 끝내는 것이었다.
십여 년 전 해외에서 혼자 일 년 가량 살 때도 향수병을 달래주는 건 구석에 둔 비빔면 한 박스였다. 거기선 구할 수 없었고, 친구가 이따금 소포로 박스채로 부쳐주었다. 요리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식단은 소박했다. 브로콜리와 계란을 넣은 볶음밥이나 베이컨, 상추, 토마토를 넣은 BLT 샌드위치, 아니면 크림치즈, 루콜라, 훈제연어를 넣은 베이글 샌드위치를 돌아가면서 만들어 먹었다. 그렇게 일주일 넘게 먹다 보면 느끼해진 위를 씻어낼 뭔가가 필요했다. 시내 한식당은 내 주머니에는 벅찼다. 비빔면은 굳이 밖에 외식하러 나갈 필요도 없었고 3분이면 바로 앞에 대령되었다. 한 그릇 끝내고 나면 한동안은 볶음밥과 샌드위치를 먹어도 괜찮았다.
가끔 새로운 브랜드의 비빔라면이 나오면 일부러 사서 끓여본다. 비빔장 맛의 밸런스라던가, 면의 쫄깃쫄깃함이 꽤 세련되었다. 팔도비빔면은 면이 좀 별로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맛의 우열을 가리자면 1등이 아닐 수도 있다. 나에게 팔도비빔면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어린 시절 향수가 라면의 형태로 고정된 그 무엇이다. 삼십여 년간 내 혀에 입력된 과거소환술에 가깝다. 누구든 그런 음식이 한두 개쯤은 있으리라. 내 피의 2프로 정도는 팔도비빔장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어느 땐가 둘째 아이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엄마 아빠는 우리가 원하는 선물을 주는데, 저는 엄마가 원하는 선물을 줄 돈이 없어서 슬퍼요."
"나는 비빔면을 원해. 네 개들이 한 봉지에 사천 원이야. 너의 용돈으로 충분히 살 수 있어. "
그래서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둘째 아이에게 포장지로 감싼 팔도비빔면을 선물로 받았다. 겨울 한정으로 어묵국물 수프가 동봉되어 있었다. 아이돌 출신 배우를 광고모델로 기용했다는 기사도 읽었다. 팔도비빔면 광고는 "오른손으로 돌리고~ 왼손으로 돌리고~"가 정석인데 말이지. 몇 년 전 출시된 경쟁사의 배홍동이 나름 치고 올라오는 모양이다. 그래도 나 같은 사람들이 있는 한 왕좌를 빼앗기는 힘들다고 본다.
예전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요새도 가끔 비빔면을 끓여 먹는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원래 제사상은 좋아하는 음식 올리는 거 아니야? 나 죽으면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팔도비빔면이나 한 그릇 끓여서 놔줘."
참기름과 오이채 잊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