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겨우 깬 둘째가 비척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엄마, 지난밤에 이상한 꿈을 꿨어요."
"원래 꿈은 이상한 거야. 나도 간밤에 이상한 꿈을 꿨는데."
"복권을 샀는데 사억 팔백만 원이 당첨된 꿈이었어요."
"나는 너네 학교가 불타는 꿈 꿨어."
"그건 너무 하잖아요."
"꿈에서 불을 보는 건 길몽이래. 우리 이번 주말에 복권이나 사자."
"어차피 안 될 건데 왜 해요?"
"......"
최근에 반포 고속터미널에 갈 일이 있었다. 대합실 한가운데 수십 명이 길게 줄 서 있었다. 신상 맛집인가 했더니 로또 판매점이었다. 명당이라고 소문이라도 났나 싶었다.
알고 보니 정말로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지금까지 1등 10여 회, 2등 50여 회, 3등은 매주 나왔다고 입구에 입간판을 세워놓았다. 고속버스 터미널에 위치해서 유동인구가 많고, 한번 명당으로 소문나면 판매량이 급증하여 당첨 확률 역시 높아지는 선순환 단계에 돌입한 것 아닌가, 라며 애써 폄하해보려 했지만. 고속터미널에는 로또 판매점이 몇 개 더 있는데 거기만큼 당첨되는 건 아닌 걸 보면, 명당의 기운이란 게 혹시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국적 샤머니즘이 머리에 스며든다.
이왕 로또 산다면 거기서 사야지.
한국인답게, 일단 김칫국부터 드링킹 하기 시작했다.
"여보, 십만 원 당첨되면 뭐 할까? 고기나 사 먹어야겠지?"
"그렇지."
"백만 원 당첨되면 뭐 할까? 가방 하나 사고, 고기 사 먹어야겠어."
"그러던가."
"천만 원 당첨되면 뭐 할까? 가방 하나 사고, 고기 사 먹고, 남은 건 뭐 할까?"
"빚 갚아야지."
"1등 당첨되면 뭐 할까?
"집 사야지."
"남는 돈으로 고기도 사 먹고."
"근데 세금으로 꽤 뜯길 텐데."
급기야 당첨되기는커녕 구입하지도 않은 복권의 세금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잠깐이나마 장밋빛 꿈을 꾸게 해 주는 게 천 원짜리 복권의 효용인가.
로또 6/45는 매주 토요일 저녁 8시 35분에 당첨자를 가린다. 그래서 각 회차의 해당분은 추첨일 저녁 8시까지만 판매한다. 처음에는 농담이었지만, 왠지 마감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어저께 꾼 더블 길몽 때문에 이번주에 꼭 로또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짙어졌다.
[토요일 19:30]
이번주는 유난히 이것저것 일이 많았다. 일곱 시반쯤 남부터미널에서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원래는 한 번에 가는 노선이 있었는데, 전력질주 했음에도 눈앞에서 놓쳤다. 다음 버스는 15분 뒤라니. 재빨리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한번 갈아타고 가는 버스가 있었는데, 환승역이 고속터미널이었다. 거기서 로또를 사라는 신의 계시인가. 근데 신의 계시라기엔 시간이 간당간당했다. 주말 저녁이라 버스 타고 가는 길이 꽤 막혔다. 나 홀로 "로또 획득 대작전"의 주인공이 되어 초조함에 다리를 떨었다.
[19:55]
버스가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정류장에 내리니 저 앞에 대합실 입구가 보였다. 차마 뛰지는 못하고 잰걸음으로 들어갔다. 저번에도 오십 명쯤 줄 서 있던데. 기다리다가 마감되는 거 아닌가? 여기까지 왔으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이다.
[19:56]
대합실은 한산했다. 줄은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살 사람은 진작에 샀겠지, 마감을 놓칠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리라. 재빨리 줄의 맨 뒤로 가 섰다. 옆에서 지켜본 구매의 프로세스는 눈부시도록 효율적이었다. 이심전심으로, 돈을 미리 준비하지 않거나 수동선택을 해서 시간을 까먹는 사람은 없었다. 로또구매공장이라고 이름 붙여도 손색없었다. 왼쪽 직원에게 재빨리 지폐를 건네고 구입할 금액과 복권방식(당연히 자동)을 말한다. 왼쪽 직원이 지폐를 건네받는 것과 동시에 오른쪽 직원이 화면에서 해당되는 버튼을 눌러 자동 복권을 출력했다. 5초도 걸리지 않았다.
[19:57]
순식간에 내 차례가 되었다. 현금이 없었다. 현금 없는 사회에 일조하기 위해 카드만 쓰기 때문이었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물었다.
"카드도 되나요"
"현금만 돼요"
"아, 이거 난감하네"
행운의 여신이 이번주는 아니라고 하는 건가.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십 미터 앞에 주거래은행의 현출인출기가 보였다. 재빨리 달려가서 만 원을 인출했다. 돈을 뽑는데 걸린 시간은 십 여초가량. 아직 기회는 남았다.
[19:58]
다시 줄을 섰다. 상도덕이 있기 때문에 거스름돈을 만들어 뒷사람의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에라, 전재산을 다 쓰기로 했다.
"만원 어치 자동 주세요"
오른쪽 직원이 로또 자동 5세트의 버튼을 두 번 눌렀다. 군더더기 없는 그 간결한 손놀림은 경외로웠다. 다섯 세트씩 두 장의 복권이 나왔다.
- 첫 번째 장 구매시각: 19시 58분 5초
- 두 번째 장 구매시각: 19시 58분 7초
당첨 여부를 떠나 성취감이 나를 감쌌다. 나는 장애물을 가까스로 헤치고 목표를 달성했다. 최선을 다했으므로 결과가 어떻든 후회는 없다.
[20:16]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애들아, 티브이 켜라. 로또 사 왔다."
둘째 아이에게 로또 숫자들을 빈 종이에 옮겨 적고, 당첨된 숫자를 하나씩 동그라미 치라고 알려주었다.
[20:35]
드디어 로또추첨방송이 시작되었다. 바로 추첨하는 게 아니고, 로또 판매액을 어떻게 썼는지 먼저 소개했다. 이번주는 전동 휠체어운반기-라는 게 있더라-를 지원한 사연이었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 도우려고 로또를 사는 건 아니잖아요. 혹시 낙첨돼도 좋은 일 했으니 서운해하지 말라는 밑밥인가?
시큰둥하던 첫째 아이도 미친 듯이 돌아가는 투명한 구체에서 숫자 공들이 나오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숫자가 맞았다.
두 번째 숫자가 맞았다.
세 번째 숫자가 맞았다.
아, 이거 혹시 이러다.....
맞춘 숫자는 세 개에서 멈췄다.
5등, 5천 원 당첨이다.
출처: 동행복권 홈페이지 (https://dhlottery.co.kr/gameInfo.do?method=buyLotto)
1등의 확률은 8백만분의 1이다. 5등은 45분의 1. 만 원에서 5천원이 되었으니 정확히 50% 건졌다. 총 당첨금은 전체 판매액의 절반이라고 하니, 통계적으로 정확히 맞은 셈이다. 4,5등인 소액의 당첨금은 로또 판매점에서 수령할 수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로또를 사겠지. 그리고 당첨금이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 사겠지.
당첨금 5천 원으로 다시 로또를 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