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마트에서 울다
H마트, 즉 한아름마트는 미국 대형 한인마트의 대명사다. 캘리포니아, 뉴저지 등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엔 꼭 있다. 미국에서 한국음식이 그리워 향수병이 걸릴 때 최선의 해결책이다. 급한 대로 동네 중국 마켓에 갈 순 있지만, 한아름마트의 정통성(일본 기꼬망이 아닌 청정원 간장이 있다)과 구색(영덕 게딱지장까지 갖췄다)은 따라올 수 없다.
'H마트에서 울다'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다. '이태원 아시안 식자재 마트에서 울다'가 교보문고 베스트셀러가 된 셈 아닌가,라는 호기심에 책을 집었다.
주인공 미셸이 H마트에서 장 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잘 알지만 서양인에게 생소할 식자재와 반찬을 하나하나 친절히 소개한다. 간장과 식초로 간한 미역무침을 소개하는 장면에 이르면, 너네는 해조류를 먹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겠지만 난 어제 밥반찬으로 먹었는걸, 하며 쓸데없는 우월감마저 든다. H마트는 한국음식과 동의어고, 한국음식은 미셸의 어머니와 동의어다. H마트에 올 때마다 미셸은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한다.
미셸은 한국계 어머니와 미국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백인, 동양인 어느 쪽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가수가 되기를 꿈꾸지만 보수적인 어머니와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운다. 암 진단받은 어머니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먹기만 할 줄 알았지 만들어본 적은 없는) 한국음식 만들기에 도전한다. 항암치료와 미셸의 간호에도 불구 어머니는 결국 세상을 떠난다.
미셸은 어머니와의 추억을 블로그에 올린다. 사람들의 호응에 힘입어 책이 되고, 포기했던 음악이 인기를 얻는다. 그래미상 후보에도 오른다. 어머니가 그렇게 떠나지 않았더라면 미셸이 음악인으로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우화 같은 이야기다.
무엇보다 책 읽기를 맛깔나게 하는 건 한국 음식에 대한 건조하지만 상세한 묘사다. 이 책은 음식 카테고리로 분류해야 하지 않을지.
미셸은 어머니의 손맛이 그리워 된장찌개를 끓여먹는다. 나라면 된장찌개가 무엇이고 어떤 재료가 들어가며 어떻게 끓이는지 일일이 묘사하지 않을 거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건 초코파이뿐만이 아니다.
미셸은 그 식상한 일을 해낸다. 왜냐하면 이 책의 독자는 대부분 한국인이 아니고, 책에 나오는 한국 음식은 생경할 거다. 나로선 새삼, 맞아 된장찌개는 된장을 풀고 고추장을 살짝 넣으면 개운하지, 하고 곱씹게 된다. 스마트폰 셀카기능으로 옆모습을 찍어 보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맞는데 내가 아닌 것 같은.
(277페이지) '뚝배기를 중불로 데우고 기름을 조금 부은 뒤 채소와 고기를 집어넣었다. 된장을 한 숟갈 가득 떠 넣고 고춧가루도 넣은 다음 그 위에 물을 부었다. 찌개가 끓어오르자 몇 분마다 확인하면서 엄마가 해주던 맛이 날 때까지 된장과 참기름을 추가했다. 드디어 만족스러운 맛이 났을 때 깍둑썰기 한 두부를 넣고 1분 정도 기다렸다가 마지막에 송송 썬 파를 투하했다.'
(된장찌개에 참기름이 들어가던가...?)
(143페이지) '계란찜은 한국 식당에서 정성 들여 만드는 반찬으로, 향긋한 풍미가 식욕을 돋우는 계란 커스터드다. 영양도 풍부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을 달래주는 듯한 부드러운 맛과 식감 때문에 어렸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다.
나는 인터넷을 뒤져 조리법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작은 볼에 계란 네 개를 깨어 넣고 포크로 휘저었다. 싱크대를 뒤져 엄마가 쓰던 도기 그릇을 찾아내 레인지 위에 올린 다음, 풀어놓은 계란과 소금 그리고 물 세 컵을 넣었다. 그렇게 뚜껑을 덮고 15분 정도 기다렸다가 다시 열어보니 꼭 연노란색 순두부처럼 생긴 완벽하게 폭신폭신한 계란찜이 완성돼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계란찜 만들기 의외로 어렵던데 능력 있네...)
남편의 연수를 따라 육아휴직을 하고 미국에서 지낼 때였다. 친하게 지낸 교포 2세 아줌마가 하나 있었다. 생김새만 한국인이었지 한국어는 유치원생처럼 어눌했고, 한국인 특유의 붙임성도 없었다. 오로지 식성만이 한국인이어서, 밥과 국이 오르는 아침상이 공통분모였다.
음식만큼 내 몸에 가까운 것이 있을까. 으깨지고 바스러져 몸 안에 직접 들어가, 영양분을 내어놓고 찌꺼기만 빠져나온다. 그 음식의 정수는 내 뼈와 살이 되어 남는다. 어미는 자기가 먹어온 대로 자식에게 먹이므로 어떤 음식은 장소를 불문하고 세대를 관통하여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음식 이야기에는 항상 귀 기울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