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몰입교육의 정수
백범 김구 선생은 '거듭 물어도 내 소원은 조국의 자주독립'이라 했다. K-직장인으로서 '거듭 물어도 내 소원은 영어 마스터'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만 해도 10년이다. 강산도 변할 기간에 왜 내 영어실력은 그대로인가. 처음 보는 외국인이 '하우 아 유?' 하면 '파인 땡큐'가 나오는 중1 교과서스러운 반사신경. 할 말이 있으면 머릿속으로 영작부터 하는 나와 달리, 해외 거주 경험이 있는 젊은 직원들은 툭 치면 자연스럽게 영어가 나온다.
외국에 살며 아이들을 국제학교에 보내다 보니 알게 됐다. 관건은 몰입이다. 영어 수업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대개 선생님의 가르침을 일방적으로 받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실력이 느는 순간은 친구들과 놀면서이다. 학교 쉬는 시간에 노는 건 찰나에 불과하다. 친구들과 제대로 놀기 위해서는 방과 후에 플레이데이트를 해야 한다.
아이들을 새 학교로 전학시킨 뒤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같은 반 '여왕벌 엄마'가 왓츠앱 메신저로 연락했다. 어린 시절을 인도네시아에서 보내고 한국인과 결혼한 호주계 중국인이었다. 뛰어난 사교력으로 모두와 두루두루 친했다. 나에게까지 연락할 정도이니. 두 살 터울의 자매가 공교롭게 내 아이들과 각각 같은 반이었다. 우리 아이들을 플레이데이트에 초대했다.
플레이데이트는 또 뭔가. 우리말로 하면 '놀이 약속' 쯤 되겠다. 사전에 날짜와 시간, 장소를 정해서 만나 노는 것이다. 연인끼리 데이트할 때도 날짜와 시간을 정하지 않는가.
놀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놀이터에서 어울리거나, "XX야~ 집에 있어?"하고 예고도 없이 쳐들어가던 것에 익숙하던 터였다. 이렇게까지 계획적일 일인가.
어릴수록 아이의 교우 관계는 부모가 좌우한다. 플레이데이트 역시 부모들끼리 알아서 잡는다. 특히 아이들의 안전이 최우선인 서양식 사고방식에선, 그렇게 안 하면 아이들이 어울려 놀 방법이 별로 없다.
여왕벌 엄마가 왓츠앱으로 날짜와 주소를 전달해 줬다. 구룡반도 서쪽의 고층 주상복합 밀집 지역이었다. 1층 로비에서 X동 XXX호 초대로 왔다고 용건을 댔다. 경비가 방문자 명단을 확인한 후 6층 테라스로 가는 엘리베이터 홀로 안내해 주었다. 다시 친구의 아파트로 가는 엘리베이터로 갈아탔다. 6층까지는 레스토랑, 커뮤니티 등 공동 부대시설이 있었고, 그 위에 네 개의 거주동이 있는 구조였다.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동선을 분리해 놓은 듯했다. 여왕벌 엄마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아이들만 두고 돌아왔다. 세 시간 후에 데리러 오라고 했다. 사전에 종료시간까지 정했다.
여왕벌 엄마는 중간중간에 사진을 찍어 왓츠앱으로 공유했다. 사진 속 아이들은 즐거워 보였다. 음악을 듣고 게임을 하고 쿠키를 만들고 있었다. 돌아오는 아이들 손에는 구디백(goody bag)이 들려 있었다. 일종의 기념품이랄까. 소소한 문구류를 넣고 포장한 꾸러미였다.
아이들은 플레이데이트를 하는 세 시간 동안 끊임없이 영어로 듣고 말하면서 학문이 아닌 언어로서 자연스럽게 체득했을 거다.
해외에 나가 자녀를 국제학교까지 보냈는데도 영어가 기대보다 늘지 않는다며 걱정하는 경우를 본다. 학교에서 한국인 친구들과 주로 어울리고, 하교 후에도 가족, 한국 친구와 함께 한국어를 쓰는 환경으로 돌아가면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중학교를 미국에서 보낸 동료는 수업보다는 친구들과 놀면서 '머리가 열리듯' 영어가 확 늘었다고 간증했다.
관건은 영어공부를 한 시간의 총합이 아니라 질이다. 가급적 영어를 쓰는 환경에 몰입할 수 있도록 방해요소를 제거할수록 효과적이다. 따돌림 때문에 한국 학생이 거의 없는 학교로 전학을 갔고, 워킹맘이라 동네 한국 친구들을 만들어 주지 못했다. 방과 후에는 필리핀 도우미와 계속 영어를 썼다. 내가 퇴근한 후에도 애들은 영어로만 말했다. 주말에는 틈틈이 플레이데이트에 아이들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영어를 몰입해서 배울 수 있는 이상적 환경을 만들어 준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