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앨범 언박싱하다
예약구매한 아이돌 그룹 투모로우 바이 투게더('투바투')의 앨범 세트가 도착했다. 학원을 마치고 파김치가 되어 밤늦게 집에 온 아이는 택배박스를 보자 화색이 돌았다. 다섯 살 때 생일선물로 신데렐라 드레스를 받았을 때 이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앨범 박스는 B5 크기의 공책을 닮았다. 과자상자 열듯 책머리-책배-책발을 디귿자로 감싼 띠를 점선을 따라 뜯으면 펼쳐지는 구조였다. 상자를 열자 잡다한 구성품이 드러났다. 사진집, 포스터, 미니포스터, 포토카드, 스티커...
그리고 씨디.
한때는 음반의 정체성으로서 플라스틱 케이스에 단단히 고정된 채 대체불가능한 지위를 누렸으나, 식품완구의 껌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씨디. 딱 자신이 들어갈 크기의 정사각형 종이봉투 안에 무심하게 숨어있었다. 저러다 흠집이라도 나면..이라고 걱정해 봤자 어차피 음악을 씨디로 듣지 않을 테니 상관없나. (게다가 앨범 세장을 샀으니 하나가 망가져도 두 장이 더 있다!)
오늘의 관전포인트는 아이의 최애인 수빈이가 얼마나 많이 나오느냐다. 기회는 21번. 각 앨범당 개별 얼굴이 나오는 굿즈는 6개, 추가로 예약구매 특전인 미공포(미공개 포카)가 한 장씩 더 있다. 여기에 앨범 종수 3을 곱한 수치다.
"태현이네요."
"범규네요."
"휴닝카이네요."
.
.
.
"앗, 수빈이예요!"
수빈이가 나온 건 포카 1장과 엽서 1장이 전부였다. 휴닝카이, 태현이 각 7개, 범규는 5개였다. 연준이는 한 장도 안 나왔다. 멤버당 1/5의 확률이 아닐 거 같다는 음모론이 고개를 들었다. 연준이 팬인 친구가 수빈이를 많이 뽑아서 교환할 기대에 부풀었는데. 그렇다. 수요공급이 맞으면 교환하는 2차 시장이 존재한다. 중고시장에선 금전거래도 되는 모양이다.
아이는 투바투에 민폐가 된다는 듯 조금의 실망이라도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수빈이 '포카'가 나왔으니까 괜찮아요. 다른 멤버들도 잘 생겼고요."
포카가 뭐길래 괜찮다는 건가. 5.5cm x 8.5cm 크기로 규격화되어 수집과 교환이 용이해서일까. 앨범 발매뿐 아니라 (진짜) 사진집을 사도 들어있다. 공개방송을 가도 준다. 예약구매의 특전으로 미공개 포카를 주기도 한다.
"그냥 똑같은 크기의 종이에 인쇄하는 거랑 뭐가 달라?"
아이가 말없이 눈으로 레이저를 쏘았다. 원가로 따지면 제로에 수렴할 텐데. 포카 열풍은 21세기 한국의 튤립 광풍 같은 건가.
아이는 이튿날 학교에서 이전 앨범의 수빈이 포카 하나와 교환해 왔다. 친구들의 조언을 들어 다이소에 가서 포카를 넣을 사진첩과 보호 슬리브를 사 왔다. 주말엔 앨범 한 장을 더 사고 싶다고 했다.
"똑같은 앨범을 네 장째 산다고?"
모 백화점 매장에서 앨범을 사면 뽑기를 해서 미공개 포카를 준다고 했다. 앨범엔 두 장이 들어 있으니 포카를 뽑을 기회는 세 번이다. 기약 없는 희망고문이라는 점에서 사행성 오락과 다를 게 없다. 브레이크를 걸 때가 왔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차라리 다른 앨범을 사. 가수를 좋아하는 건 괜찮지만 선을 넘지는 말자."
듣지도 않을 씨디를 만드느라 플라스틱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환경부의 자료에 따르면 씨디, 포토카드, 포장비닐 등 음반에 들어가는 플라스틱이 최근 6년간 14배 이상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투바투의 기획사인 하이브가 올해 7월 발표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따르면 작년에 쓴 플라스틱만 894.6t에 달한다. 아이도 몇 백 그램쯤 보탠 셈이다.
좋아하는 음반을 사서 음악을 즐기는 소박한 차원을 넘어섰다. 시각, 청각, 촉각이 결합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아이돌 산업의 수레바퀴는 환경 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아이가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고 싶다.
아이는 수빈이 포카를 한 장 뽑아왔다. 나머지 포카는 다른 멤버였다. 계속 뽑는다 해도 그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