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번의 밤을 보내고 나면 당신을 잊을까요
K에게.
안녕하세요
오늘은 눈이 내렸습니다. 노력하고는 있지만 침대에서 빠져나오는 용기가 한참이나 부족한 요즘이라 정오가 다 되어서야 베란다 문을 열고 내리는 눈과 이미 소복히 쌓인 창밖의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K.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는 요즘 운전을 곧잘 하고있습니다. 대학 선배에게 저렴하게 넘겨받은 중고차를 끌고 이곳저곳을 열심히 다니는 중입니다. 오늘도 저녁 무렵 눈에 갇혀 얼어있던 차 창문에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눈을 녹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곤 좋아하는 햄버거를 사서 운전을 하며 배를 채우고 새벽까지 운영하는 외딴 카페를 찾았습니다.
감자튀김을 씹으며 카페를 향해 운전하는 내내 울적해졌습니다. 그 옛날 사업을 정리하게 되면서 나는 차 한대 없는 초라한 삼십대 남자가 되었고 당신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겠다 다짐했던 그 옛날 설레던 시절의 남자는 습기찬 희뿌연 유리창 뒤로 숨어버렸습니다. 괜찮다고 다독이는 당신 앞에서 나는 더 나은 성공을 위해 어쩔 수 없다며 서글픈 허세를 내보이는 못난 사람을 연기해야했던 그때가. 당신의 피곤함을 받쳐주지 못했던 후회가 마음의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물론 행복했지요.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행복했으니까요. 그치만 과연 당신도 그랬을까 궁금해집니다. 당신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차를 기다리고 버스를 기다리고 환승을 하기위해 걸어야 했던 그 불편함에 당신도 어쩌지 못할 원망이 없었을까요.
예정보다 일찍 카페를 빠져나와 당신과 갔던 소양강댐 청평사 선착장에 다녀왔습니다. 미처 차오르지 못한 달빛에 어둠이 물러나지는 않아 강물을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별님들과 잠시 인사를 나눠볼 수는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눈이 쌓인 세상은 당신과 왔던 풍경과 달라 조금은 낯설었지만 나는 그 풍경 위로 당신과의 추억을 살짝 얹으며 다시 한번 당신을 그리워해보기도 했습니다.
K.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기도를 합니다.
당신을 향한 그리움 속에서 아픔만 살짝 묻어둘 수는 없느냐고 하느님께 투정을 부립니다.
혹시 그 옛날 어머님들의 거짓말처럼 백번의 밤을 지내고 나면 무언가 나타나지 않을까요. 사막으로 떠난 아버지를 기다리듯 아픔만큼은 지워달란 소망이 이뤄지지 않을까요. 아니면 백번의 밤을 보내고 나면 당신을 잊을 수 있을까요.
나는 백번의 편지를 써보려고합니다.
그저 그리워만하는 시간 속에 하루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번의 밤을 세어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워하지 않는 날은 없으니까요. 내게 그리움에 빠진 시간은 하루도, 일주일도, 한달도 모두 멈춰진 시간입니다. 그렇기에 하나의 편지를 하나의 밤으로 여겨 나는 백번이 편지를 써보려고 합니다. 사무치게 잊고 싶지 않지만 그 또한 당신을 위한 나의 못되고 멍청하고 바보같은 포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