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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밤

고장난 TV

by 숨결

안녕하세요 K.

지난주까지만 해도 눈이 내렸는데 오늘은 비가 내립니다.

비내리는 풍경이 너무나 오랜만이라 우산을 써야하는 불편함에도 내심 반가운 기분입니다.

K. 당신에게 비오는 하루는 어땠나요.

저는 비가 반가우면서도 그 속에서 당신을 떠올려 세워보느라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하루의 일상이 늘 이렇게 감정기복이 심해 나 스스로도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복잡하면서도 무저갱의 어둠처럼 또 고요하게 어둡습니다.


요즘 나는 약을 먹고 있습니다. 작년 10월 부터였으니 석달이 어느새 지났습니다. 아침에 한 알 그리고 저녁에 한 알. 아마도 다음달 부터는 다른 한 가지 약이 더해져 두 알씩 먹어야 합니다. 식후에 먹으라고 했지만 때 맞춰 식사를 하지를 않으니 그냥 일어나면 먹고 자기전에 먹습니다. 자는 시간도 들쑥날쑥이라 아침 저녁이 따로 없습니다. 그나마도 까맣게 잊고 챙겨먹지 않는 날이 많아 의사선생님께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약을 먹는다고 해서 아프거나 한건 아닙니다. 아직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병으로 인해 제 눈 앞에는 가득히 눈이 내리듯 점점이 빛나는 하나의 막이 생겼습니다. 오래된 증상이었는데 증상이 심해지다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찌르는 이명까지 생겨버렸습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아무래도 당신이 없는 불안함과 아픔으로 내가 많이 망가진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을 절대 원망하지 않습니다. 되려 내가 이토록 당신을 사랑했고 이만큼이나 아플정도로 그리워 할 줄 아는 사람이란게 대견하기까지 합니다.


나의 증상은 고장난 옛날 TV같습니다.

정규방송이 지난 늦은 시간이나 안테나가 연결되지 않아 보이는 브라운관의 노이즈는 내 눈앞의 빛나는 장막을 닮았습니다. 그리고 화면조정시간에 나오는 날카로운 고주파는 내 귀에 들리는 이명과 참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서 '아. 나는 잊혀진 고장난 TV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하곤 합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고 집안의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시골집의 고장난 옛날 TV말입니다. 집을 지켜줄 누군가가 없다면 언젠가 당연스레 버려질 잊혀지고 오래된 존재말입니다.


이렇듯 나는 깊은 자괴감에 종종 빠집니다.

실제로 나의 생활은 많이 망가져있고 마음과 정신의 상태도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건강도 딱히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어찌됐든 평범하게는 살아보려 발버둥쳐보곤 있는데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당신을 만난다면 그 때 혹시 당신을 잡아볼 수 있도록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다는 사실에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딱히 힘써가며 살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그저 흐르면 흐르는데로 세월에 몸을 맡기렵니다. 어쩌면 그게 나에게 가장 잘 맞는 모습이겠다 싶습니다.


K. 혹여 이런 내 소식을 듣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나는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도 않고 아픈 모습을 쉽사리 내보이지도 않으니까요. 설령 당신을 마주친다해도 당신은 내 아픔을 모를겁니다. 그리고 내 주변에서도 알지 못할 겁니다. 세상 속의 나는 언제나같은 모습일테니 그리 걱정은 부디 마시길 바랍니다. 그저 걱정인 것은 오직 당신 하나입니다. 아프지 않다면 다행이지만 아직까지 당신도 아프다면 부디 나의 아픔보다는 딱 한뼘만큼만이라도 덜 아프길 바라며 고장난 TV의 전원을 내리겠습니다.


좋은 밤. 좋은 꿈이 당신에게 찾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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