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익어가는 밤
술 한잔 했습니다.
단 둘이서는 처음 술을 마시는 낯익지만 낯선 그런 사람과 술을 마셨습니다.
친하지 않지만 친하지 않지도 않은 내 주변의 수 많은 사람들 중 하나이지만 오늘 얼굴을 맞대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 만큼은 친한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 앞에서 술 마시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술마신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한잔만 마셔도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이 때론 나조차도 징그럽고 흉해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을 만나고 있는 내 모습은 정갈하고 깨끗한 사람이길 바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만나고 어느 순간부터 술을 잘 마시지 않게 되었지요.
술에 취한 밤이 익숙해 진지 오래되었습니다.
더이상 한 잔의 맥주캔에 취해버리는 나약함도 오래 전 일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가슴이 너무 아프고 답답해 다급히 약을 찾든 마시던 술이었습니다.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는 침대 위 어둠 속의 처량함보다는 흉하게 취해 쓰러져 잠들 수 있음이 나았거든요.
이상하게도 아픔은 익숙해지지 않는데 술은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술이 익숙해지고 부터는 술을 마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늦은 밤 초췌함에 헝클어진 머리로 넝마같은 거적대기 마냥 침대 위에 내동댕이쳐진 채로 아프고 답답해하며 잠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그렇게 더 이상 술이 의미가 없어졌음에도 나는 여전히 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힘을 내야겠다거나 무언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냥 얼마전부터 더 깊은 공허함에 빠져들면서 술을 마시는 것조차 귀찮아졌습니다. 그래서 며칠간은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분위기 좋은 술집에서 맛있는 요리와 즐거운 대화가 있는 술을 마셨습니다. 즐겁구나 생각되려니 당연스래 당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K. 당신이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나에게 종종 술을 권했던 이유가 있었지요.
당신은 내가 술을 마시면 말이 많아지고 속내를 내보여서 좋다고 했습니다. 사실 당신이 그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 속내를 이야기 하는 건 아주 부끄럽고 나약한 모습이란 생각이 너무 강해 나의 이야기를 하는것 조차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슬그머니 당신에게 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더라두요.
그래서 나는 오늘 '아하' 소리와 함께 눈을 크게 뜨이며 알게 되었습니다. 깊은 허무에 술을 마시지 않게 된건 이젠 어떤 이에게도 나를. 나에 대해 이야기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란걸요.
왠지 칭얼대고 싶은 밤입니다.
당신과 한잔의 술을 서로의 앞에 두고 빨개진 내 얼굴이 귀엽다며 웃고 있는 그대와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에 나는 마지막 잔을 마시며 한번도 만나 본적도 없는 지긋지긋하게 익숙한 내일을 맞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