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남자의 초상
안녕하세요
당장 내일이라도 봄이 올것만같이 한층 따뜻해진 날입니다. 해가 높고 하늘이 깊고 구름은 둥둥입니다.
나는 지금 당신과 언젠가 물놀이를 왔었던 가평의 어느 리조트 근처의 카페에 앉아 있습니다.
날은 따듯하지만 한동안 단단히도 얼어붙었던 청평호의 두터운 얼음은 여전히 단단해보이고 도저히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래토록 얼었던만큼 조금 풀린 날씨정도로 순순히 그의 단단함을 풀어내주지 않습니다. 오래된 깊은 사랑이 쉽사리 사그러지지 않는 것과 많이 닮았습니다.
안타깝지만 코로나의 영향으로 그 리조트는 지금 문을 닫았습니다.
직원들은 모두 떠나고 새로 지은 건물의 대금을 지불하지 못한 탓에 건물의 외벽에는 '공사대금 미지급으로 유치권 행사 중'이라는 현수막이 붙어있습니다. 그 시끌벅적했던 공간에 채워진 겨울날의 차가운 적막은 나처럼 씁쓸해보입니다.
리조트로 놀러올 수 있었던 시작부터 천천히 되새겨보았습니다.
항상 쪼들리며 살고 있던 나에게 거리도 멀고 이용료도 적지 않게 부담이었던 레져 리조트로의 나들이는 사실 썩 달갑지 못한 일이었었습니다. 한번도 돈이 없어 놀러갈 수 없다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내가 우리의 데이트를 마냥 신나하지 못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돈이야 그때그때 만들어내면 그만이었지만 고정적인 수입을 버는게 아니었던 저로서는 그 만들어내는 일 자체가 고달팠거든요. 그러다 기업의 이벤트 당첨을 이용해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함께 리조트에서의 수상레져라는 아름다운 시간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항상이었지만 분명 그때도 나는 다짐했을겁니다. 돈을 벌어야겠노라고.
지금도 넉넉하진 않지만 그 이후로 차근차근 준비해 이제는 먹고 노는데 돈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작지만 차도 있고 이전보다는 넓어진 집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당신이 없습니다.
이별까지의 시간들 중 가장 많은 후회와 미안함은 나의 부끄러운 가난이었습니다.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던게 아니라 순전히 나의 선택과 결정으로 만들어진 가난이었기에 나는 이렇다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직도 나는 젊은 치기에 창업이란 선택을 하지 않고 지겹고 좀이 쑤시더라도 순순히 남들처럼 회사에 들어가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삶을 살았다면하는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K 당신에겐 정말이지 미안하다는 말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없는 당신이 떠오르는 당신이 그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미안하단말만큼은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당신과의 시간 속에서 해주지 못한 너무 많은 가난의 산물과 당신을 떠나도록 만든 선택을 해야만 했던 가난한 결정이 어둠별처럼 떠오릅니다.
K.나는 당신과 헤어진 날이 마치 어제인 것만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토록 오늘이 고통스러울리가 없습니다. 비참한 미안함으로 바탕을 깔아 둔 우리의 마침표이기에 어떤 의미로도 아름다울 수 없을겁니다. 그래서 나는 뒤늦은 지금에도 차마 비겁하게 당신의 앞으로 찾아 걸어 갈 수가 없습니다.
당신을 말했습니다.
나라는 남자는 힘든 때가 오면 언제든 도망가버릴것만 같다고.
네 나는 도망갈 것입니다. 당신이 아프고 힘들아면 나는 결단코 도망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프고 힘들어 당신의 삶에 걸림돌이 된다면 언제든 도망갈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기에 나의 가난이 다시 찾아온다면 나는 당신의 불안을 위로해 줄 수 없을겁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저 당신 스스로 그 불안을 이겨내고 나를 감싸안아 주길 비겁하게 바랄 가난한 마음의 남자입니다.
오늘의 밤편지는 깊은 부끄러움에 마무리조차 쉽지가 않습니다.
지금의 가득한 미안한 마음으로 불완전한 마침표를 찍어봅니다.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