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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번째 밤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

by 숨결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



겨울스러운 겨울입니다 K

어제 내렸던 눈은 가루눈이라고 합니다. 뉴스에서 가루눈이 내리고나면 추워질거라는 인사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오늘은 많이도 추워졌습니다. 요즘은 운전을 해서만 다니다보니 외투를 챙겨오지 않았는데 차에서 내리고 잠시 밖에 있는 짧은 시간에도 차가운 바람이 파고들어 안일했던 마음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사를 오던 날 형수님이 선물로 향초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한동안 비어있던 집은 사람의 체취가 옅어지고 빈 건물의 콘크리트 냄새와 새로운 입주자를 위해 집주인이 도배를 해준탓에 공산품의 냄새가 짙게 깔리워져있었기에 집에 있는 동안에는 항상 향초에 불을 붙여두었습니다. 덕분에 은은하게 퍼지는 향과 새로운 세입자의 온기로 점점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으로 물들여갈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언제나 향을 낼 수 있는 작은 고체방향제를 두어 더욱 짙은 향으로 채워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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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정리하지 못한 얼마간의 짐을 꺼내다 당신이 언젠가 주었던 바닐라향의 틴라이트 캔들을 찾았습니다. 여섯개가 한 세트인 캔들 중 두 개를 이미 녹였고 네 개의 캔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잠시잠깐 고민하다 캔들 하나를 꺼내 불을 붙여보았습니다. 작디 작은 캔들이라 짙게 향이 배어나오지는 않았지만 인듯 아닌듯한 향이 코 끝에 잠깐씩 머물다 갔습니다. 그저 의자에 앉아 촛불을 바라보며 절반쯤 타들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을 정도로 그저 앉아만 있었습니다.


당신이 직접 만들었던 향초도 아직 남아있습니다. 뚜껑까지 가진 예쁜 유리용기에 작은 꽃을 넣어 예쁘게 만든 향초입니다. 두 개가 남아있기에 하나를 태워녹여 향을 맡아볼까했지만 이내 관두었습니다. 녹아 사라진 자리를 빈 공간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저 초는 나의 삶만큼 오래 존재하겠지만 녹아 남긴 향은 순간으로서 존재하기에 아름다울뿐이니까요.


테이(Tei)라는 가수를 참 좋아합니다. 호소하는 듯한 절절한 목소리와 가사가 좋았고 한 때 오페라를 부르는 프로에서도 우승할 만큼 노래를 잘합니다. 테이가 불렀던 노래 중 하나의 제목이 '사랑은...향기를 남기고'입니다. 이별하는 아픔을 노래하면서 지금까지의 사랑이 향기가 되어 흩어진다는 가사를 가진 노래.

사랑은 순간의 시간을 이어가는 것이기에 태워 녹일 함께하는 사랑의 시간이 없다면 이내 흩어질 향이 되어 사라지겠지요. 우리의 사랑도 이젠 향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만든 향이 어떤 향을 가졌는지가 생각나지 않아 마음이 아려옵니다. 베이비파우더향이었을까요 피오니향이었을까요. 당신은 기억이 날까요?


당신이 만들어 남긴 향초를 태우는 날은 아마도 오지 않을듯 합니다.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다면 파라핀에 담긴 향마저 사라질테지만 그렇다해도 나는 초를 태워 녹이지 못할것 같습니다. 내 가슴에 남은 사랑처럼 흩어 사라지지 않고 말라 갈라지더라도 살아있는 동안 화석처럼 남겨두려고 합니다. 이것이 내가 추억을 보관하는 방법인가 봅니다.


곧 봄이 올 것입니다.

나는 다가올 봄 바람에 당신의 향기가 담겨오길 기다리렵니다.

당신은 녹아 싹 튀우는 땅의 내음을 기다리세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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