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를 잃고 방황하는 중간즈음

여든일곱 번째 밤

by 숨결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는 중간즈음




친애하는 K.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언제부턴가 당신에게 보내는 이 편지들이 길을 잃었습니다.

당신에 대한 그리움도 원망도 사랑도 아닌 편지들. 그저 백번의 밤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쓰여지고 있는 글입니다.

과연 나는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무엇을 더 말하고 싶은 걸까요.

나는 왜 백번의 편지를 채우려고 하는 걸까요


결말을 알지 못하는 글을 쓰려고 했었습니다

알고 싶었습니다. 백번의 편지를 마칠 때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은 어떤 모습일지를요

토해내고 뱉어내어 참아내고 참회하는 시간을 이겨낸 내 모습은 세상을 멸망시킬 마왕을 무찌른 용사의 위풍당당한 모습이거나 바늘이 없는 낚시를 하고 있는 산 속 선비의 유유자적한 모습일거라 살풋 상상해보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더이상 당신에게 속삭일 말들이 생각나질 않습니다.

오직 당신만을 위한 이야기를 적어야 하는데 이젠 당신이 없는 날들에 순응하여 당연해져버린 순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수 많은 누군가들처럼 이별과 그리움의 굴레에서 벗어나 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이제 나는 당신을 잊고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라는 평범하고 무미건조한 결말로 서서히 편지를 채워가려고도 했습니다.

그리움을 짜내어 만들어내는 편지는 당신과 나 모두를 속이는 파렴치한 행위이기에 평범한 보통의 결말로 마무리를 지어가야겠구나 했지요. 그 사이 당신에게 전하고자 했던 말과 나의 평범한 보통의 일상이 맞물리지가 않아 나는 더욱 괴로워해야만 했습니다. 날이 갈 수록 편지를 쓰는 주기가 길어지는 모습에서 그런 나의 마음을 증명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잠시 쉬어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떤 결말의 대사를 남겨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휴식은 고작 하루가 될지도 모르고 일년이나 수년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휴식의 의미는 당신에게 백번의 편지를 써야한다는 의무감에 억지로 횟수를 채워가는 나의 태도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입니다. 그리움에 젖어 단 한번만이라도 우연히 당신을 만나고 싶어했던 예전의 소망처럼 정말로 당신을 마주하게 되어 마음의 파도가 일렁이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에야 어차피 결말은 '나는 당신을 잊고 살아갑니다.' 밖에 없지 않겠어요. 어차피 그저그런 결말이라면 꽃이라도 달고 색종이라도 오려붙여 예쁘게 치장할 준비라도 해보겠습니다. 적어도 K 당신을 위한 글에게는 그 정도 예의는 갖춰야하니까요.


나를 송두리째 잊었을 당신

당신이 만났던 인연중엔 이런 바보같고 아둔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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