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층 복도는 훤하게 뚫린 창문이 길가와 맞닿아 있다. 쉬는 시간마다 몰려나가 창문 난간에 매달려 거리를 오가는 이들을 의미 없이 바라보는 일은 공부와 담쌓은 사춘기 소녀의 지루함을 덜어낼 수 있는 막간의 즐거움이다. 학기 초 학부모 상담이 시작되던 그날도 어김없이 복도의 창문에 매달려 멍하니 길가를 내다보는 내 눈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붉디붉은 색에 꽂혔다.
엄마다. 붉은 원피스에 가늘디 가는 새까만 에나멜 허리띠를 졸라매고 당당히 걸어오는 엄마다. 한껏 부풀린 파마머리와 붉은 립스틱을 정성스레 바르고 걸어오는 나의 엄마다. 새까만 눈동자에 오똑 쏟은 콧대, 어디 나가 있어도 눈길 가는 나의 엄마다. 창가에 반쯤 몸이 나와 있는 나는 붉은 원피스의 엄마와 눈이 마주친다. 엄마는 환하디 환한 미소로 나에게 손을 흔들어 준다. 아이들은 너네 엄마냐며, 정말 미인이라고 한마디씩 쏟아낸다. 내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대문 앞이다. 엄마는 가방 속에 쑤셔놓았던 촌스러운 긴 치마를 꺼내 원피스 위에 겹쳐 입는다. 곱게 쥐고 있던 손수건을 펼치더니 붉은 립스틱을 쓰윽 닦아낸다. 두 눈 깊게 칠해 놓았던 보랏빛 아이새도우도 문질 문질 지워낸다. 화려하기 그지없던 엄마 얼굴이 맹숭맹숭 자다 일어난 얼굴로 변해버렸다. 엄마는 씩 웃어 보인다. 대문을 열고 들어간 집에 아버지와 할머니가 저녁상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붉은 원피스를 벗어두고 부엌으로 쫓아들어가 한 상을 차려낸다. 엄마의 붉은 원피스는 옷장 구석 보일 듯 말 듯 걸려있다.
시간이 흘러 엄마만의 옷장을 가질 수 있는 시절이 되었다. 엄마의 옷장에는 붉은 옷들이 가득이다. 양귀비 꽃같이 야시시한 붉은 옷도 있고, 꾸덕하게 말라버린 피딱지 같은 검붉은 옷도 있다. 반짝이는 실들이 사이사이 스민 별빛같은 붉은옷도 있고, 새빨간 꽃들이 넘치게 있는 요란한 붉은 옷들도 있다.
붉은 장미가 온사방을 뒤덮는 오월, 아파트 울타리 사이로 삐죽히 튀어 나온 붉은 장미를 보고 있노라니 붉은 원피스를 입은 그시절의 엄마가 뜨겁게 그립다.